"미안해, 오빠짓 안 해서."

너도 오빠 말 잘 들어

by 조르바
황성초 3학년 6반 일기장
황성초 3학년 6반 일기장
1999년 8월 24일 화요일
제목: 아영이에게

아영아, 미안해. 오빠짓 안 해서.
다음부터는 더욱 좋은 사이가 되자.
이때까지 때리고 괴롭힌 것 미안해. 양보도 잘할게.
너도 오빠말 잘 들어.


'아, 저 마지막 한 줄이 없었더라면.'


참 좋은 '사과의 정석'이 될 뻔했는데. '너도 오빠 말 잘 들어." 이 반전 같은 한 마디에 나는 웃음이 나왔다. 아영이와 나는 4살 터울의 남매다. 얼마 전까지 서울의 한 집에서 같이 지낸 적이 있었다. 작은 집 한칸에 청소 문제는 늘 다툼의 대상이었다. "그래 내가 청소 안 한 건 잘못했지. 근데... 너도 오빠 말 좀 잘 들어라." 동생에게 가끔씩 용돈 잘 주는 착한 오빠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의 사과 방식은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친구와 다퉜을 때. 먼저 "미안하다" 한 마디를 꺼내다는 건 죽기보다 어렵다. 늘 상대 탓을 했다. 자존심 어린 치기였다. 연인과 다퉜을 때. 늘 이겨먹길 원했고, 상대가 먼저 바뀌길 바랬다. "그래 내가 진짜 미안해. 안 그럴게 앞으로. 근데 너도 똑같이 잘못한 건 맞잖아." 사과로 시작한 대화는 종잡을 수 없는 다툼으로 폭발해버렸다. 관계가 1만큼이라도 좁혀지긴커녕,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멀어져 버렸다.


나의 사과는 대체로 '관.계.악.화'라는 네 글자의 실패로 끝났다. 그냥 말이라도 안 했으면 관계 유지라도 됐을 걸. 늘 후회로 끝나버리는 나의 사과. 나이가 들수록 모든 일에 요령이 생기는데, 반대로 사과는 갈수록 어렵고 까다로워만 진다. 사과에는 수학처럼 정답이 없고, 사람마다 사과를 받아들이는 기준도 제각각이다. 정식 교육을 받으며 사과하는 법을 배워본 적은 더더욱 없었다. 말은 참 쉬운데 말처럼 되지 않는 것, 알면 알수록 어렵고 까다로운 게 사과였다.


당최 왜 그런 걸까, 생각해보면 나는 늘 사과라는 외형을 취하면서 상대의 변화를 요구했었다. '내가 너에게 사과를 하고 있어'라는 예쁜 포장지를 입혔다. 하지만 포장지 안에는 '사과를 했으니 너도 바뀌어야 해'라는 '지시'와 '강요'를 담았다. 사과하는 척, 다툼의 원인을 교묘하게 상대의 탓으로 돌려버렸다. 나는 그대로면서 상대의 변화를 요구하는 이기적인 마음이랄까. 어쩌면 사과를 강요한 '폭력'을 저질렀던 게 아니었을까. 상대의 반발이 증폭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나의 잘못을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못된 심보, 상대방을 꼭 이겨먹겠다는 미성숙함이 온전히 드러났던 것이다.


영화 <레터 투 줄리엣>에는 남자 주인공 찰리가 여자 주인공인 소피와 다툼을 한 뒤 사과를 하려 한다. 소피의 뒤에서 머뭇거리며 망설이자 옆에 있던 찰리의 엄마는 "눈을 보고 사과하라"라고 조언을 건넨다. 찰리는 소피의 맞은편에 앉아 소피의 눈을 보고 말한다. "진심으로 사과할게 소피. 다신 안 그럴 거야." 두 마디 외의 다른 말은 없었다. 하지만 충분했다. 찰리는 진심을 다해 용서를 빌었고, 소피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진심을 받아들였다.


'너도 오빠 말 잘 들어'


지금부터 저 한 줄을 지워버리는 연습이 필요한 시점이다. 마지막 한 줄에 앞의 모든 진심들이 와르르 무너져버리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 지워버린 공간에는 진심어린 눈빛과 말투를 가득 담고 싶다. 정녕 진심이라면 어떤 말을 덧붙이지 않더라도 그 떨림이 전달될 수 있지 않을까. 쉽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진실되고 품격있는 사과에 상대도 순순히 마음의 문을 열어주는 게 아닐까. 진심을 다해 말할 것. 잘못을 인정하고 변명하지 않는 것. 상대를 탓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나로부터 배운 '사과의 정석'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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