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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용 Nov 07. 2018

여행을 기억하는 3가지 방법

여행의 시간은 꿈처럼 쉽게 잊힌다

“계속 누워있고 싶지만 할 일이 있으니까 아침에 일어나게 되죠. 다들 그런 거예요.”
- 이병률 대화집 『안으로 멀리뛰기』 중에서


여행을 하면 계속 누워있고 싶다. 나를 깨우는 사람도, 정해진 규칙도 없다. 하지만 늘 누워있을 수는 없으니, 매일 아침 몸을 일으킬 지속적인 일이 필요하다. 나의 경우엔 여행을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이 그것이었다.


나는 3가지 방법을 통해 여행을 기록했다. 첫째는 ‘사진’이고, 둘째는 ‘영상’이었으며, 셋째는 ‘글’이었다. 세계일주를 할 때도, 늘 친구에게 빌린 미러리스 카메라와 영상용 짐벌 카메라, 노트 앱이 켜진 핸드폰을 들고 다녔다. 그리고 여행에서 마주치는 모든 순간마다 ‘사진으로 찍을 것인가, 영상으로 찍을 것인가, 글로 적어 놓을 것인가’를 빠르게 판단해야 했다. ‘이건 사진으로 찍어야 해!’, ‘이건 영상으로 찍어야 해!’, ‘잊어버리기 전에 적어놔야지.’하면서 정신없이 카메라를 바꿔가며 찍거나 메모를 했다. 재밌는 건, 기록 수단을 전제로 했을 때 세계를 대하는 관점 자체가 달라진다는 것이었다. 풍경을 보는 눈은 카메라처럼 바라보고, 머리는 단편 에세이처럼 기억을 구성하는 식이었다.


'Photo!'를 외치며 포즈를 취하던 아이들. 장난스러운 표정은 카메라가 아니면 남길 수 없다.


사진은 '시간'이라는 요소가 없는, 포착과 편집이 한 번에 일어나는 활동이다. 그래서 담고자 하는 메시지가 상징이나 기표로 표현된다. 또한 어떤 피사체에 집중할 것인가 하는 편집 과정이 촬영하는 동시에 진행되기 때문에 셔터를 누를 때마다 신중해야 했다. 반면에 영상은 ‘공간’과 ‘시간’이 결합한 매체다. 그래서 피사체보다는 시간의 흐름에서 발생하는 스토리텔링에 초점을 맞춘다. 연속성이 있어서 편집하기도 어렵지만 그만큼 자유롭고 현실에 더 가깝게 표현할 수 있었다.


사진이나 영상으로 채 표현되지 않은 이야기나 생각들은 핸드폰 메모장을 열어 짤막하게 적었다. 예를 들어, ‘간디를 닮은 택시 아저씨’라든지 ‘모아이 석상의 뒤통수’하고 쉽게 떠올릴 수 있게 써놓았다. 마치 책에 메모지를 꽂듯이 중요한 순간을 표시해둔 것이다. 그리고 일정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오면, 그 짤막한 단어들을 꺼내 이야기로 풀어썼다. 여행 에세이 <조르바, 여행은 어땠어요?>도 이런 짧은 이야기를 모아 만든 것이다. 사진이나 영상이 현실의 경험을 닮은 이미지, 즉 ‘기표’라면, 텍스트는 현실 세계의 대응체와 전혀 상관없는 '상징'들로 코딩되어 쓰인 결과물이었다. 즉, 날 것의 경험이 ‘나’라는 의식을 거쳐 필터링됐다.


LA의 저녁 노을은 어느 시간보다 특별했다. 그럼에도 인상은 쉽게 잊혀진다.


여행을 여러 관점에서 기록해야 하는 이유는 여행의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다가 꿈처럼 쉽게 잊히기 때문이다. 여러 관점에서 남겨진 기록들을 보면 그 기억들이 너무나 입체적으로 그려진다. 영화를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여행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또 다른 여행이 된다. 사진은 ‘점’, 글은 ‘선’, 영상은 ‘면’이라서, 비로소 여행을 부피 있는 시간으로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하나의 경험이 매체에 따라서 다르게 전달되는 과정을 관찰하는 일은 흥미롭다.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맥루한의 말처럼 그저 수단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우리의 기억마저 왜곡한다. 하지만 그 왜곡은 너무나 즐거운 일이었다. 지난 일들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일은 매일 아침, 내 몸을 일으킬 정도로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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