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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르바 윤 Mar 26. 2020

[인터뷰] 조혜연_바둑 인생 세대

24년차 프로 바둑기사, 조혜연 9단의 태도

조혜연 9단을 만났습니다. 만 11세에 바둑 프로기사로 입단하여 ‘여자 이창호’로 불리던 그녀는 어느덧 24년 차 중견 기사가 됐습니다. 그 사이에 수많은 승리와 패배를 맛보았고, 바둑계에는 AI라는 커다란 지각변동이 일어났습니다.


내가 아는 조혜연은 활달하고 유쾌한 사람입니다. 주변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 정도로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칩니다. 그러나 사진 촬영을 위해 바둑돌을 집는 순간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가볍게 시작한 수와 수 사이에는 적막함이 흘렀고, 돌이 부딪히는 소리와 셔터 소리만이 반짝였습니다. 이것이 ‘프로’라는 이름으로 승부의 세계에서 24년을 버텨온 무게감이었습니다.


나는 바둑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녀의 인생과 바둑에 대해 묻고 싶었습니다. 이 시대에 바둑의 의미는 무엇인지,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바둑 보급에 힘쓰도록 만드는지 궁금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바둑인 조혜연과 인간 조혜연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이번 인터뷰는 그런 측면에서 의미가 있었다고 나는 평가하고 싶습니다.



바둑인 조혜연의 24년 복기


안녕하세요.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저는 서른 중반에서 후반으로 넘어가는 바둑인 조혜연입니다. 대한민국 미혼 여성이고, 세계 바둑 보급을 위해 여행을 다니기도 합니다. 프로기사 생활을 24년 정도 했기 때문에, 젊은 나이지만 중견기사로 불리고 있습니다. 바둑계의 정책적인 부분이나 대중의 인식에서 멀어지고 있는 부분에서 책임감과 부채의식을 갖고 있는 세대이기도 합니다. 저도 하루하루 살아가기 버겁지만, 바둑계 후배들이 더 힘들거든요. 그래서 힘들어도 많이 내색하지 못하는 세대이기도 합니다.


24년 동안 많은 이력과 수식어가 생겼습니다.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금메달리스트, 국내 여자 바둑기사 최초 600승 달성, 스타트업 CEO… 지난 24년을 복기해본다면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바둑을 배운 시간까지 하면 30년이 되었네요. 저는 입단을 빨리한 편이에요. 초등학교 6학년이었으니까 너무 어렸죠.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남을 정도의 시간을 프로기사로서 살아왔어요. 성장기를 바둑계에서 보냈고, 좌절과 방황도 바둑계에서 했습니다. 배가 고프더라도 바둑으로 돌파구를 삼고 싶다는 자존심이 있었고, 그게 지금껏 저를 지탱해줬어요. 24년간 프로기사로서 사는 시간이 80%, 인간 조혜연으로서 제 자신을 찾아가려는 시간을 20% 정도 보낸 것 같아요.


바둑계가 변화하는 모습을 처음부터 봐오셨겠네요.
예전 선배님들은 프라이드가 엄청났어요. 하지만 지금은 프로기사들이 이전과 같은 프라이드를 가질 수가 없어요. 돈을 못 버니까요. 바둑으로 돈을 벌어야 자존감이 생기는데, 초일류 기사를 제외하고는 생계유지가 어려워요.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연봉이 100만 원이 넘지 않는 프로기사가 370명 중에 100명이 넘어요. 바둑계의 호황기부터 불황기까지 겪어오면서, 바둑인으로 살겠다는 자존심과 정체성은 견고해졌지만 여전히 고민이 많아요. 제 자신도 그렇지만, 주변 사람들이 너무 힘들어하기 때문에 더 고민이 돼요.



하나의 길을 걷는다는 것


일찍부터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셨어요. 지금까지도 그 길을 유지하고 있고요.

바둑을 좋아했고, 좋아하는 일이 천직이 되었으니까 어찌 보면 행복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선물로 받았다고 생각해요. 한편으로는 빨리 발견한 만큼 고민이 컸어요. 깊어질수록 문이 좁아지는 길을 걸어야 하거든요. 보통은 입단 후에 엄청난 실력자를 만나게 되면서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돼요. ‘내가 노력한다고 될 수준인가?’ 포기하는 경우도 프로 세계에 참 많아요. 어릴 때일수록 더 많이 흔들리지 않습니까. 지금이라도 내가 다른 걸 찾아 나서야 하나, 라는 생각도 많이 했고요. 갈등이 많았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잘 버텼다’라는 생각이 드네요.


포기하지 않고 버티는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사실 쉽지가 않습니다. 포기하는 사람을 워낙 많이 봤기 때문에, 포기하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요.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쭉 가는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레전드로 불리더라고요. 바둑 역사로 봤을 때, 이창호, 조훈현, 이세돌 같은 사람들. 결국 자기 자신의 것을 찾아 나선 사람이 끝까지 이기는 것 같아요. 무엇이 됐든 나의 색깔을 찾은 사람들이 이 바닥에서 이탈하지 않고 롱런하는 공통점이 있어요.


자신만의 색깔을 어떻게 찾으셨나요.

제가 극복한 것은 무엇이냐면, 어릴 적에는 ‘여자 이창호’라고 불릴 정도로 촉망받았거든요. 그때는 칭찬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누가 이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조혜연이 ‘여자 이창호’라는 수식어를 벗어던지고 ‘조혜연’으로 불릴 때 자신만의 색깔을 찾은 것이다.” 저는 바둑 자체에서는 찾지 못했고, 우회를 했어요. (보통 프로기사와 달리) 대학교에 진학했고, 해외 바둑 보급 활동도 하면서 ‘바둑의 외연을 넓인 기사’, ‘다재다능한 기사’, ‘다른 기사들이 하지 않는 것을 찾아서 하는 기사’라고 불리게 됐어요. 그게 무엇이 됐든 저만의 색깔을 가지게 된 거죠.



패배에 대처하는 자세


바둑에 대해 잘 모르지만, 바둑은 ‘승부’잖아요. 결국 승리자와 패배자가 나오게 되고요. 1000번 이상의 경기를 하셨어요. 그만큼 많은 승리와 패배를 경험하셨고요. 패배에 어떻게 대처하셨나요.
어릴 적에는 숱하게 울었어요. 정말 중요한 대국은 수능에서 떨어진 느낌과 같아요. 스무 살 이전까지는 죽어야겠다는 극단적인 생각도 많이 했어요. 패배의 아픔이 너무 크니까, 제가 진 바둑에서 자꾸만 도망을 쳤어요. 그 바둑을 떠올리면 아프고 괴롭고 바둑을 하기가 싫으니까요. 이제는 패배가 과거만큼 아프지 않으니까 다시 돌이켜봐요. 제가 진 이유를 알고 ‘이렇게 두는 것이 나았구나’를 스스로 알게 되면 아프더라도 납득이 돼요.


어릴 적에는 패배가 정말 크게 다가왔겠군요.

패배의 아픔이 무지무지하게 커요. 승리의 기쁨보다 100배는 더 큰 것 같아요. 그런데 너무 괴로워하면 바둑을 둘 수가 없어요. 그래서 패배에 대해서 어느 정도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해요. 승부욕이 강한 사람은 강해질 확률은 높지만, 금방 그만 포기하게 돼요. 너무 괴롭거든요. 그렇다고 승부욕이 없으면 발전하지 않아요. 패배를 적절하게 승화시켜서 그다음 판의 자양분으로 만들어야 해요.  


지금은 어느 정도 감정 조절이 가능해지셨나요?
저는 10점 만점에 6 정도는 되는 것 같아요. 어릴 적에는 2였고요. 연차도 쌓이고, 나이가 들면서 어느 정도 저절로 되는 부분이라 칭찬받을 만큼은 아니에요. 대국 10분 전에 마음이 어떨 것 같으세요? 반은 설레고 반은 두려워요. 그때가 가장 힘들거든요. 그때 온갖 잡념이 떠올라요. 그때 저는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런 잡념들은 내가 경기를 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제 자신에게 이야기해줘요. 그리고 요즘에는 제가 힘든 만큼 상대방도 이기기 위해서 정말 힘들었겠구나를 배우게 되는 것 같아요. 상대방의 승리도 공짜로 얻어진 게 아니거든요.



AI 시대에서 바둑의 의미는


알파고, 인공지능 바둑 기술에 우호적인 입장으로 알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후 최고 수준에 이르는 궁극의 바둑’이라고 직접 평가한 바도 있고요. AI 시대에서 바둑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요?
바둑계는 알파고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어요. 어찌 보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바둑에 과학을 접목해서 두는 첫 번째 시대가 된 거예요. 바둑은 삼천 년 넘는 역사를 겪으면서, 사람의 지혜와 이론들이 정립되어 내려왔는데요. 이것들을 모두 과학의 시대에 넘겨주게 된 거죠. 저는 환영하는 입장이에요. 바둑이 감성적이고 사람의 특성에 의존해왔다면, 이제는 사람의 특색에 과학적인 접근을 더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AI 시대를 맞게 되면서 전문가가 사라졌지만, 모두가 자신의 색깔을 찾아나갈 수 있는 시대라고 생각하거든요.


오히려 AI 시대이기 때문에, 모두가 바둑을 통해 자신의 색깔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럼요. 이전에는 전문가의 권위가 너무 강했어요. ‘정석’이라고 하죠. 전문가가 말한 대로 두지 않으면 틀렸다고 혼이 났어요. 너는 왜 네 마음대로 두냐는 거죠. 바둑 전문가들의 권위가 너무 강해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수를 내면 지적을 했어요. 지금은 공평하게 열린 시대라고 생각해요. 어떤 수를 두더라도 AI가 지지해주면 괜찮은 수가 되었잖아요. 전문가나 선생님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고요.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나의 색깔을 찾아내는 사람이 이 바닥에서 살아남을 거라고 생각해요. 생각해보면 AI 시대에도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 초일류 기사들의 순위는 변하지 않았어요.


우리는 지금 왜 바둑을 두어야 할까요. 바둑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에 바둑은 자기 자신을 만나는 기회를 만들어줘요. 그게 아니라면 컴퓨터 게임과도 다르지 않을 것 같아요. 바둑을 두면서 나의 생각을 계속 만나요. 내가 실제로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내 손으로 직접 한 판의 바둑을 두어가면서 이때까지 몰랐던 나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게 돼요. 마치 책 한 권을 읽는 것 같아요.



앞으로의 조혜연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세요?
계속 활달하고 유쾌한 조혜연이고 싶고요. 제 친구들이 ‘혜연은 우리의 친구였어.’라고 기억해줬으면 좋겠어요. 바둑의 성취보다도요. 제 친구들은 그런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으니까요. 저는 바둑으로 전 세계적으로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고, 좋은 영향을 주고받고 있어요. ‘그 친구 활달했는데.’ 딱 그 정도면 될 것 같아요. 큰 꿈이죠. 갑자기 제가 우울해지거나 망가질 수도 있으니까. 절대 소소한 꿈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해외 바둑 보급에도 힘쓰고 계시죠.
저는 바둑을 가르치고, 바둑의 가치를 알리고 싶은 사람이에요. 한국은 바둑에 있어서는 부유한 나라예요. 선생님도 많고,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배울 수 있어요. 그런데 해외에는 바둑을 간절하게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바둑의 매력까지는 알았는데 실력이 늘지 않는 사람들이죠. 거기에서 한 발자국 나아가도록 도와주는 것이 제 역할인 것 같아요. 이제는 AI와 유튜브가 있고, 최근에는 온라인 티칭을 시작했거든요. 제 꿈을 이룰 수 있는 환경은 갖추어진 것 같아요.


다시 태어나도 바둑 프로기사가 되실 건가요?
고민이네요. 저는 바둑으로 받은 것이 많아요. 하지만 제가 바둑을 취미로 사는 인생은 안 살아봤잖아요? 저는 제 길만 보면서 달려왔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삶의 무게나 깊이를 잘 몰라요. 그래서 제가 살아보지 못한 삶에 대한 동경이 있어요. 하지만 제가 그런 삶을 산다면, 또다시 프로 기사의 삶을 동경했을 것 같아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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