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과 스타트업, 일과 나에 대해서
수영 님을 처음 만난 건 작년 말이었습니다. 당시 대기업에 다니고 있던 수영 님은 새로운 도전을 하기 위해 조언을 구하는 중이었습니다. 결국 퇴사를 결정하고 초기 스타트업에 합류하여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가까스로 자신이 원하는 일을 선택한 사람의 마음은 어떤 것인지, 현실은 기대했던 모습과 같았는지, 일의 의미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 말입니다. 그런 질문들이 마음에 쌓였을 때, 어느 조용한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수영 님.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저는 이수영입니다. 지금은 온라인 라이브 홈트레이닝 서비스 '리트니스'에서 프로덕트 오너(Product owner)로 일하고 있어요. 프로덕트 오너는 제품을 기획하고 사용자들이 잘 사용할 수 있도록 운영하는 역할이에요. 결국 가치 있는 제품을 만들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저는 프로덕트 오너로 일하고 싶어서 이전 직장을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제품을 포괄적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거든요. 이전에 일했던 곳은 대기업이었기 때문에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어요. 제품을 만드는 수많은 단계 중에서 10~15% 정도만 담당했었죠.
‘수티브잡스’라는 별명이 있었을 정도로 굉장한 IT 기기 덕후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지금도 너무 좋아해요. 여전히 새로운 디바이스를 사는 일을 계속하고 있어요. 제가 처음 IT 기기를 좋아하게 됐을 때는 새로운 모델에 따라 다이나믹하게 바뀌었던 시기였어요. 요즘은 상향평준화가 되어서 새로운 제품이 나와도 이전 모델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아요. 그래도 완성도가 높은 상황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기 위한 고민이 보이거든요. 그런 것들을 보는 걸 좋아해요.
어떻게 보면 관심사와 걸맞은 회사에 계셨었잖아요.
사실은 대기업에 들어가는 걸 희망했던 건 아니었어요. 앱 만드는 법을 배우고 싶어서 대외 활동을 했다가 입사 기회가 생겼어요. 합격하고 나서 고민을 했어요. 당시에는 그 회사가 너무 올드해 보였다고 해야 할까요. 내가 가서 무얼 배울 수 있을지,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고민했었어요. 그런데 결국 가기로 했어요. 내가 원하는 삶을 선택하고 나서 실패했을 때 주위에서 보낼 비난을 감당할 자신이 없는 거예요. 내 선택에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더라구요. 그래서 입사하게 됐죠.
대기업에서 보낸 시간은 어떠셨어요?
힘들었어요.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겨냈어야 했는데, 그 방법이 조금 잘못됐었어요. 마이너스 통장을 뚫어서 유럽도 가보고 실리콘밸리도 갔어요. 그렇게 여행도 가고 사고 싶은 물건을 사다 보니까 신용카드 값 때문에 당장은 회사에서 나올 수가 없게 된 거예요. 게다가 처음에 인사팀에 발령이 났어요. 저는 기획팀에 가고 싶었거든요. 보수적인 조직에서 일하려니 죽을 맛이었어요. 나는 나가야겠는데 이미 대출은 받아놨고. 어쨌든 들어갔으니 6개월도 못 버티고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기 싫었어요. 그 이후의 부서 생활도 썩 저와 잘 맞는 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배운 것이 있다면 하기 싫은 일을 하는 법을 배운 것 같아요. 그전까지는 하고 싶은 일만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하기 싫은 일을 해야하더라구요. 그런 것에 대해 받아들이고 배울 수 있었던 과정이었어요.
작년 말이었죠. 회사를 나와서 새로운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으셨는데요. 무엇이 가장 고민이었나요?
가장 고민했던 건, 내가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걸 놓을 수 있는지였던 것 같아요. 어마어마한 건 아니지만 한번 나오면 다시 입사하기 어렵잖아요. 그래서 당시에는 새로운 일을 하고 싶지만 알량한 것을 놓는다는 것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어요. 그런데 막상 놓고 나니까 아무것도 아니더라구요.
결국 퇴사를 하고 지금의 팀에 합류하셨죠. 벌써 6개월이 지났는데요. 어떠세요?
엄청 힘들어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힘들어요. 제가 생각한 다이나믹함은 요정도였는데, 현실은 이만큼인 거예요. 그래서 사무실에서 농담으로 “이런 삶을 원해서 퇴사한 건 맞지만, 이렇게까지 원한 건 아니었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어요.(웃음) 그래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냐고 묻는다면,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내가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다르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나는 잘 못하지만. 요즘 그렇게 부딪히는 과정에서 배우는 게 좋아요. 부족한 나를 마주하는 과정이랄까요. 예전에는 남 탓, 구조 탓, 회사 탓, 환경 탓을 많이 했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온전히 내 탓밖에 할 수 없는 거예요. 그게 지금 저에게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그렇게 힘든데도 계속해서 일하게 만드는 동력이 무엇일까요?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전엔 죽어있었죠, 데친 시금치처럼. 예전엔 몸은 편했는데 마음은 힘들었다면, 요즘은 몸은 힘든데 마음은 편해요.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도 케미가 좋고요. 예전에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일상을 잘 몰랐거든요. 물어볼 일도 별로 없었어요. 회사가 크니까 나와 맞지 않는 동료가 있어도 굳이 맞추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았어요. 그런데 지금 팀원들과는 계속 붙어있기도 하고, 무언가를 같이 하기로 뜻을 모은 사람들이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그들이 지금까지 어떤 일을 해왔고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돼요.
일에 대해서 고민하는 분들이 참 많잖아요. 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언젠가 내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순간을 살아야 할 때가 있거든요. 그때 나 자신을 너무 미워하지 않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제가 대기업에 다니면서 아쉬웠던 게 뭐냐면, 당시에 제 자신이 너무 싫다 보니까 당연히 주변 사람들에게도 잘하지 못했어요. 다른 사람까지 신경 쓰는 게 너무 버거웠거든요. 일에 대해서 고민한다는 건 내가 원하는 모습과 현실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 일치하지 않는 삶도 당장 때려치울 용기가 없다면 살긴 살아야 되잖아요. 그 상황에 너무 매몰되지 말고, 조금씩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마음에는 안 들지만 최대한 할 수 있는 걸 하고, 배울 수 있는 걸 배우고, 나머지 시간에는 온전히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겠다는 생각이 중요한데, 저는 그러질 못했어요. 그게 조금 아쉬워요.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나요?
가장 앞장서서 무언가를 하는 사람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팀에서 제 역할이 뭘까를 고민해봤는데요.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하거나 익숙하지 않은 일을 해야 할 때 가장 앞에서 지르는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스타트를 끊는 사람. 마무리는 팀원 분들이 잘 지어주시니까요.
목표나 꿈이 있으신가요?
사실 저희 서비스가 잘될지 어떨지 모르겠어요. 물론 잘됐으면 좋겠지만요. 왜 그럴 때가 있잖아요. 가끔 과거를 돌아보면 떠올리기도 싫은 순간이 있거든요. 서비스가 잘되든 안되든, 지금 팀원들과 보내는 시간이 언제든지 재미있게 추억하고 꺼내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나중에 돌이켜봐도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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