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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용 Jan 25. 2021

떠나야 하는 것을 붙잡는 일


1.

요즘은 책 출간에 아침저녁으로 마음을 쓰고 있다. 책을 낸다는 것이 이렇게나 두렵고 겁먹을 일이었던가. 독립출판은 이번에 꼭 두 번째인데 처음일 때보다 가슴이 더 졸인다.


어제는 한 업체를 만나 인쇄와 굿즈 제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노트를 만들고 싶어요. 구독자 중에 제 글을 종종 필사하신다는 분들이 계셔서요." 이런 말을 자신감 없이 한 것에 나는 곧장 후회했다. 당당하고 싶으면서도 '어쩌면 오만이 아닐까'라는 양가감정에 나는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선글라스다. 그 뒤에 떨리는 눈동자를 숨겨야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면서,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간신히 이야기를 마칠 수 있었다.


오늘은 이른 아침부터 디자이너 분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화상으로 진행하는 것이었기에, 우리는 조금 퀭한 얼굴로 모니터 속에 마주 앉았다. 책 표지를 논의하는 자리였는데, 보내주신 시안들이 모두 마음에 들었다. 나는 결국 마음을 쉽게 정하지 못하고 내일까지 생각을 정리해보겠다고 말했다. 내가 쓴 미진한 글들에 이토록 세련된 표지가 마땅하기나 할까. 이쯤 되니 나는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내글구려병'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 작가가 자신의 글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안한 마음에 자꾸만 문장을 고쳐 쓰거나 새로운 문단을 채우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게 어떤 마음이 잘 알 것 같다. 지금 내가 체험 중이기 때문. 그만큼 내 글이 종이에 인쇄되고 책으로 엮인다는 사실은 기쁘고도 부담스러운 일이다. 특히 그 일련의 과정을 스스로 해내야 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나는 1월이 끝나기 전까지만 내 글을 고치기로 나 자신과 미적지근한 약속을 한다.


2.

나는 시를 자주 읽는 편은 아니지만, 시를 읽다 보면 글을 쓰는 내게 어떠한 위안이 되었다. 언젠가 심보선 시인은 '시란 아무 말 대잔치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시는 읽는 사람에게는 무척이나 불친절한 행위다. 일상 언어로는 해석되지 않는 단어의 나열들. 행과 행 사이에서 일어나는 심상의 도약과 부정된 논리들. 형식과 상식에서 자유로운 이미지들. 그런 점에서 시는 일종의 침묵의 행위 예술인 셈이다. 예술가는 구태여 정답을 제공하지 않는다. 관객 또한 구태여 정답을 찾지 않는다. 그저 작품을 사이에 두고, 의도와 해석의 소용돌이 속에 서있는 체험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시를 읽을수록 정답을 제공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났다.


나는 음악에 그리 조예가 깊지는 않지만, 음악을 듣다 보면 묘한 자신감이 생겼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아티스트와 장르가 있었고, 음악의 세계에서는 잘하고 못하는 것이 아닌 각자의 개성과 신선한 시도로 인정되었다. 그건 무엇을 세상에 내놓든 용인된다는 의미였다. '나는 그저 인디씬의 싱어송라이터일 뿐이야. 나는 소외된 취향을 채워주는 숨겨진 아티스트일 뿐이야.'라고 생각하면 이상스러울 만큼 용기가 생겼다. 


서로를 완벽히 이해하겠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세상은 내게 그것을 은유적으로 알려주려고 했고, 나는 자꾸만 놓치며 살았다.


3.

오늘 밤은 맥주를 한 캔 마셔야겠다. 그리고 내가 쓴 지난 글들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보내주어야지. 그리고 아직 쓰지 못한 소중한 이야기들을 생각하자. 떠나야 하는 것을 붙잡는 일은, 그게 무엇이 되었건 한 번도 유쾌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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