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슬럼프'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나는 잦은 좌절과 정체를 겪어왔다. 내가 인생 곡선을 그린다면, 위아래로 가파르게 요동치는 곡선이 그려질 것이다. 그것은 계절처럼 찾아오는 감정의 순환이었다. 앞으로의 인생이 늘 밝기만을 바라지만, 언젠가 겨울이 찾아오듯 커다란 슬픔도 찾아올 것이다. 의식이 한 단계 성숙하면, 그 아래 단계로 떨어지지 않는 것이 삶의 작동 방식이라 여겼다. 그러나 배우고 경험할수록 새로운 기쁨을 알게 되었고, 그만큼 새로운 슬픔과 분노와 공포도 알게 되었다. 살아간다는 건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닌 모양이다.
2
길거리에 서있는 표지판과 신호등을 미워하던 때가 있었다. 내가 가야 할 곳을 가리키거나 막거나 허가하는 것이 싫었다. 그만큼 나는 누군가의 지시에 익숙해져 있었다. 조금씩 저항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날 즈음이었다. 그때 나는 사진기로 도로의 표지판과 신호등을 찍으러 다녔다. 그리고 그것들을 지탱하고 있는 기둥과 지지대를 컴퓨터로 지우기 시작했다. 그러면 불안하고 앙상한 지시만이 공중에 남게 되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짓곤 했다. 잊고 싶은 기억이다.
3
의욕을 되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건 분명 의욕이 없는 사람뿐이다. 바라는 것이 없다는 건 일시적으로 죽었다는 것과 같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자물쇠 같은 것이 있어서, 열쇠를 꽂으면 금방 열리게 된다. 내게 그 열쇠란 무엇일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몇 주 만에 산책에 나섰다. 한강에는 갓얼음이 얼었고, 소나무를 제외한 모든 잎사귀는 죽어있었다. 나는 세상이 나처럼 멈춰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산책을 하고 아이와 강아지는 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