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껏 울 수 없는 어른이 돼버렸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비행기 안을 울렸다.
비행기는 상공을 향해 이륙 중이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건 흡사 발작에 가까웠다. 인간의 신비를 느낄 정도로 기분 나쁜 진동이 머리를 울렸다. 금방 지치겠지 하고 마음을 가라앉혔지만, 고막을 찢을듯한 소리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이 쪽을 쳐다보려다 그만뒀다. 혹여나 부모에게 눈치를 주게 될까 싶었다. 부모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지금 가장 힘들 이는 어떻게든 아이를 달래 보려고 흔들어대는 부모일 것이다. 힘든 건 아이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동체의 상승과 추락이 저 아이에게는 죽음에서 느끼는 공포와 같을 것이다.
최근 저렇게 울어본 적이 언제였을까?
삶을 살아가다 보면 문득 울고 싶은 순간이 오게 마련이다. 아무리 감정이 메마르고 무뎌진 나라도 마음 놓고 울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스스로를 ‘어른’이라고 규정하기 시작하면서 눈물은 부끄럽고 나약한 부산물이 됐다. 돌이켜보면 나는 나 자신을 표현하는 데 꽤 서툴렀다. 타인 앞에선 무의식적으로 내 감정을 숨겨버리곤 했다. 그것이 기쁜 감정이든, 슬픈 감정이든, 화난 감정이든 말이다. 그래서 울고 싶을 때면 술과 함께 삼켜버리거나, 그걸로도 힘들 땐 글을 쓰곤 했다.
예전에 썼던 글을 읽다 보면 문법 체계로도 억누르지 못하는 괴로움이 느껴졌다. 사실 그것은 글쓰기라기보다 배출행위에 가까웠다. 기본적인 문맥의 일관성도 갖추지 않은 채로 쏟아붓는 쾌락 행위였다. 마치 아기가 부르짖는 옹알이였다. 수없이 반복되고 반복되어, 이미 포화상태인 감정들의 습관적인 흘러 넘침이었다. 오랫동안 무뎌지고, 부패되어버린 것을 시원하게 내뱉어 버리는 재채기였다. 울컥울컥 부대껴 올라오는 속을 참지 못하고 게워낸 구역질이었다. 글로 공백을 채우는 시간 동안은 사고와 행동 사이에 여과장치가 존재하지 않았다.
짧고 어린 인생을 참는 삶으로 살았다. 참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행해온 ‘인내(忍耐)’는 ‘비워냄’이 아니라, ‘쌓아둠’이었다. 언제부터 인지 내 속엔 쌓아둘 공간이 부족해졌다. 자꾸만 울컥할 때마다 나는 '이성'이라는 뚜껑으로 간신히 막아두었다. 보통 ‘죄책감’이나 ‘부끄러움’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술을 마시게 되면서 쌓인 감정이 부글부글 끓어올랐고, 막아 놓은 뚜껑이 들썩였다. 그 사이로 새어 나온 것들을 못 참고 터트렸다. 평소엔 하지도 못할 말을 쉽게 내뱉었다. 누군가에겐 웃음을, 또 누군가에겐 상처를 줬다. 나는 목적지도 없는 뜀박질을 해댔다. 그렇게 몇 년을 게워내고 나서야 멍울지고, 곪아버린 응어리가 새삼 간지럽게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술이 있어야 간신히 속에 있는 얘기를 할 수 있는 어른이 돼버렸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과 달랐을까
나도 저 아이처럼 발작하듯 몸을 뒤틀고, 목이 쉴 정도로 소리를 지르고, 지쳐 쓰러질 정도로 울어버렸다면 지금과 달랐을까. 망설이지 않고 웃거나 슬퍼하거나 화낼 수 있었을까. 그런 멍청한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 사람에게 상처가 된 말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까. 그토록 오래 힘들어하지 않고 툭툭 털어버릴 수 있었을까.
나는 자신이 없어서 아이의 울음을 하염없이 듣고 있었다. 비행기는 어느새 이륙을 끝내고 안정권에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울음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나도 속으로 울고 있었다. 눈물과 울음은 아이가 대신 흘려주고 소리 내주었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한동안 그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