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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용 Oct 01. 2022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


지금 생각해보면 어릴 적의 나는 다소 밋밋하고 따분한 존재였는데, 그것은 취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상한 취미를 말하는 게 아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사랑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그 질문에 대해 자신 있게, 그리고 명징하게 말하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과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무언가를 진정으로 좋아하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집요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거칠게 나누자면, 좋아하는 것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티셔츠로 입고 다닐 만큼 자랑하고 싶은 것. 또 하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차마 말하기 부끄러운, 어떤 면에서는 은밀한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티셔츠에 이러한 것들을 담을 수 있다. 맥주와 하이볼, 제로 콜라, 수박, UFC, 한국의 인디 뮤지션, 일회용 필름 카메라, 팟캐스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강릉의 안목 해변... 이것들은 단순히 선호의 영역은 아니다. 좋아하는 이유를 분명히 설명할 수 있고, 전시될 수 있으며,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일종의 자부심을 가지는 것들이다.


반면에 누구에게나 떳떳하게 말하지는 못하지만 좋아하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나는 아내의 등을 긁어주는 일을 좋아한다. 아내는 종종 내게 등을 긁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면 등의 이쪽저쪽을 슬슬, 적당히 시원할 정도로 긁어준다. 처음에는 등을 긁어주는 일이 귀찮았으나 그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나만이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 순간부터 좋아졌다. 함께 살아간다는 건 서로의 등을 긁어줄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을 당신에게 맡긴다.' 등을 긁어줄 수 있는 사이라는 게 왠지 상징적이라고 여겨진 순간 나는 그 일을 반기고 좋아하게 되었다.


요즘은 무언가를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이 타고난 재능이나 초능력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특정 대상에 관심을 갖고 자신의 일정 부분을 버리고 미련하게 시간을 쏟을 수 있는 자만이 무언가를 좋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게는 MBTI 보다도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것을 왜 좋아하는지가 그 사람을 더 잘 설명한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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