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에 계획을 세우고 연말에 좌절하기를 여러 번 반복한 결과, 나는 '거창한 계획은 어김없이 실패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접근 방식을 바꾸었다. 큰 목표를 세우는 대신 아주 작고 구체적인 습관들을 매일 반복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매달 10권의 책을 읽는다'는 거창한 목표다. 하지만 '매일 한 챕터씩 읽는다'라든지 '매일 5분만 읽는다'라든지 '출근길에 책을 펼쳐본다'는 것은 실행 가능한 작은 목표다. 시작은 작을수록 좋다. 마치 양치질처럼 사소해야 한다. 그래야 부담이 덜하다. 범위나 강도를 조금씩 늘리기도 수월하다.
필사도 그런 의미에서 시작되었다. '필사'란 책이나 좋은 문장을 손으로 직접 베껴 쓰는 일이다. 나의 경우는 이렇다. 매일 책을 읽고 마음에 드는 문장을 수첩에 적는다. 그리고 밤 12시가 되면 필사한 문장을 아내와 공유한다. 오늘은 어떤 문장을 적었는지, 왜 그 문장을 적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일련의 의식이 작년 10월부터 시작해 5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책을 매일 읽게 되었다. 보통은 필사할 문장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읽었지만, 어느새 책 속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때도 있었다. 매일 적게는 10분, 많게는 2시간씩 읽었다.
필사를 하면 실용적인 독서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예전에는 책을 읽어도 그 이야기가 꿈처럼 쉽게 잊히곤 했다. 그런데 필사를 하면 책을 읽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발견된 의미 있는 문장들이 기록으로 남게 된다. 아무리 내 취향이 아니거나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책일지라도 그중에 꼭 하나의 문장 정도는 뽑아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어떤 책이든, 일단 읽으면 무언가가 남는다는 감각이 생겼다.
또한 필사를 하면 내 마음 상태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많고 많은 문장들 사이에서 왜 하필이면 이 문장이 내 눈에 띄었을까?'라고 스스로 질문하고 답하게 된다. 예를 들면, '한 사람이 어른이 돼서 세상을 살아갈 때 힘이 되는 것은 어린 시절에 받은 사랑과 지지다.(고수리 <선명한 사랑>)'을 필사한 2023년 11월 28일에는 아이에게 충분한 사랑과 관심을 주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모든 게 순조로울 때 칭찬을 받고 영광을 누리길 바란다면 쓰레기 같은 일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개리 비숍 <나는 인생의 아주 작은 것부터 바꿔보기로 했다>)'라는 문장을 적은 2024년 2월 11일에는 아마도 내가 쓰레기 같은 일을 억울하게 감당하고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날그날 필사한 문장은 내 생각이나 감정을 보여주는 거울이 된다. 내가 가까운 사람과 함께 필사하기를 권하는 이유도 이와 같다.
독서는 기본적으로 작가와 독자의 내밀한 대화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과 그 안에서 체득한 지식, 훑고 지나간 감정들을 심연에서 길어 올린다. 독자는 그 자취를 따라 천천히 걸어간다. 때에 따라 잠시 쉬었다 가기도 하고 도중에 멈추기도 한다. 그렇게 여러 길을 걷다 보면 우리가 보낸 서로 다른 시간이, 각자의 기쁨이, 소박한 다짐이, 결정적인 조언이, 정성스럽게 다듬어진 문장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