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의 산물들
여행지에서 나는 꼭 그 지역의 미술관을 들른다. 아름다운 그림을 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미술관 건물 자체에 그 도시의 특성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고요함도 큰 장점이다. 도서관과는 또 다른 느낌의 그 차분한 정적임은 다른 사람들이 그림을 감상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배려심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고, 묘하게 보는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작품들의 힘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생각할 것이 많을 때 미술관에 가면 다른 아티스트들이 해놓은 고민의 산물을 볼 수 있어 나 혼자만 힘든 것이 아니구나라는 알 수 없는 위로도 받을 수 있다.
지금까지 가본 미술관 중에 가장 아름다웠던 미술관은 로마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Galleria Nazionale d' Arte Moderna e Contemporanea)이다. 로마에 방문했을 당시 한창 현대 미술에 빠져 있었고, 이 난해한 미술의 힘은 무엇인지 궁금했다. 로마의 현대 미술관 건물은 으리으리하고 웅장하다. 로마에 있는 다른 역사적인 건물들과도 잘 어울린다. 내부에 들어가면 조각상들이 많아 그 조각상들을 보고 있노라면 과거로 이동한 것 같은 느낌도 받는다. 그리고 현대 미술관이라고는 하지만 최근 미술 작품뿐만 아니라 반 고흐, 세잔, 드가 등의 작품도 있고, 뒤샹의 샘 또한 전시되어 있다. 로마에 와서 굳이 굳이 이곳까지 걸어가 작품들을 보고 다시 보르게세 공원을 지나 걸어온 것이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잘한 일로 느껴진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현대 미술관(Barcelona Museum of Contemporary Art)에도 갔었는데, 일정 중 딱 하루 남아 간 날이 하필이면 휴관일이어서 외관만 구경할 수 있었다. 리처드 마이어가 설계해 백색의 선과 면이 주를 이루는 이 미술관은 보고만 있어도 마음의 안정감을 주는 건물이었다. 모든 요소가 반드시 있어야 할 곳에만 있어 과하지 않고 정교했다. 그리고 미술관 앞에선 많은 스케이터들이 보드를 타고 있어서 그 모습을 보는 것도 꽤나 재밌었다. 조용한 건축물 앞에 운동성을 주는 존재들이 있어 그 대조가 주는 생동감이 있었다.
영국 리버풀에 있는 워커 아트 갤러리(Walker Art Gallery) 또한 내가 좋아하는 미술관이다. 이곳의 친절함 때문에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는데, 나는 입장하기 전 메고 있는 크로스 백의 크기가 애매해서 보관함에 넣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위에서 안내해주시는 할아버지께서 괜찮으니 얼른 올라오라고 손짓을 하셨다. 나는 나를 지켜보고 계셨다는 것에 놀랐고, 내 고민을 단번에 맞추신 할아버지의 배려심에 놀랐다. 할아버지께서는 내가 올라가자 문까지 손수 열어주시며 즐기라고 했다. 덕분에 차근차근히 걸으며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이 미술관에 있는 조각상 전시실도 아름다운데, 창에서 들어오는 빛이 조각상에게 가닿으면 그들이 마치 살아날 것처럼 배치되어 있다. 조각상들 사이를 오가며 살펴보는 경험은 또 처음이라 새로웠다. 작품들도 아주 많다. 너무 빼곡하게 걸려있어서 목이 아프고 다리가 아플 정도로 봐야 모든 전시관을 볼 수 있다.
예전에는 미술관을 가는 게 지루하고 재미없었다. 이 그림들이 다 뭐기에 내가 봐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그림들이 다 똑같아 보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그림을 그린 화가들에 대해서 알게 되고, 그 작품이 만들어진 시기에 대해서 공부하고, 미술 작품 자체가 주는 아름다움을 느끼려고 해 보니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림을 보거나 작품을 보면 어떤 이야기가 그 안에 있는지 상상해 보게 되고,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의 표정도 살피게 되었다. 미술관에 가면 작품을 만든 사람들의 시각에서 시작해 조금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미술관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