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마시자

다만, 취할 정도로는 말고.

by 조세핀

봄. 찬기를 머금은 따수운 바람이 코끝을 간질이는 봄이 왔다. 그리고 그런 바람이 불면 떠오르는 우윳빛 음료가 있다. 바로 막걸리다. 왜 봄에 막걸리를 떠올릴까? 그 부분에 관해 고찰해 본 적은 없지만, 20대 초 나의 음주 생활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대학교에 입학한 후 처음 맞는 3월, 날씨가 조금이라도 따뜻해지자 학생들이 잔디밭에서 막걸리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때는 풋풋한 신입생이었기에 ‘와 진짜 대학생들 술 많이 먹는다’고 생각하면서 남 일인 양 지나갔는데, 그다음 해에는 내가 거기에 앉아 있었다.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왜 꼭 막걸리여야 했는지 생각해 보면 소주는 왠지 거나하게 취할 느낌이고, 맥주는 (여름이지) 봄에 마시기엔 좀 그렇고, 막 푸릇푸릇해진 잔디를 보면 파전이 생각나기도 하니까 꼭 막걸리여야만 했다.


또다시 찾아온 봄에는 선배라고 또, 후배들과 앉아서 먹기는 그러니 주점에 (숨어) 들어가서 마셨다. 학교 앞엔 전통 주점이 많았고 각 가게마다 특장점이 있어서 고르는 맛이 있었다. 어디는 파전이 맛있고, 어디는 막걸리에 꿀을 타주었다. 아무 목적 없이 마음이 맞거나 시간이 맞는 이들끼리 모여서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마셔도 좋았다. 나누었던 이야기들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물씬 다가온 봄기운과 차가운 양은 잔, 끊이지 않던 웃음소리,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두꺼운 파전은 잠깐만 눈을 감아도 느껴진다.


그다음 해의 봄에 마실 막걸리도 내심 기대했지만, 이제 술 마시러 가자고 하면 철없어 보일 4학년이 되었다. 그 누구도 철없다고 놀리진 않았지만 분위기가 말해주고 있었다. 다들 이곳을 떠나 어딘가로 들어가려고 했으며, 서둘러 다음 세계로 진입하지 않으면 뒤처질까 봐 겁냈다. 그렇게 마지막일 것이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순간이 마지막이 되고, 그 해의 봄날은 더욱 빠르게 지나가 버렸다.


어느새 우리는 ‘술 권하는 사회’의 일원이 되었고, 몇 년 전과는 달리 만나도 술을 거의 마시지 않게 되었다. 마셔도 그때 마셨던 막걸리는 아니었다. 회식 때 들이키는 소주, 맥주, 막걸리는 모임에서 퇴출되고 가격이 좀 있어 한 잔만 음미할 수 있는 술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함께 할 사람이 없으면 부담스러운 막걸리 한 주전자는 그렇게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때로는 마음이 맞는 이들과 시간을 맞춰 막걸리 한 잔을 기울이기도 했지만, ‘철’이 생겨서일까? 도무지 그때의 그 막걸리 맛이 아니었다. 그 봄날의 즐거웠던 기억을 되살려 보려고 해 봐도, 이제는 촘촘히 떠오르지 않는다. 그때는 몰랐다. 언뜻 고개를 돌리면 있을 것 같은 풍경들이 이렇게 쉽게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점점 더 빠르게 바뀌는 계절 속에 어느새 나도 변할지 모르겠다. 당연하게 여겼지만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은 것들도 늘어난다. 떠나간 사람들, 끊어진 관계, 문 닫은 식당, 절판된 책들, 해져버린 아끼는 양말들까지. 이들은 문득 생각나 보란 듯이 나를 스쳐 지나가 버린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사라질 것을 알기에 소중하게 간직하려고 애를 쓴다. 더더욱 지금의 한 잔을 흠뻑 마시려고 몰두한다. 자꾸 다짐한다. 기분 좋게 취할 정도로 봄을 가득 마시자. 양껏 마시자. 오랫동안 이 봄이 기억에 남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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