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의 냄새와 모양
한동안은 잠잠히 생각했다. B에 대해서.
B를 만나면서 여태껏 - 정말 친한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서는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야 그럴게, 단 며칠 지냈다는 물리적인 시간에 비해서 감정의 깊이는 너무나도 턱없이 깊었으니까.
B의 유령은 한동안 나를 따라다녔다. 가끔은 그 애를 어디서든지 볼 수 있었다. 퇴근길에서, 홀로 영화를 보러 간 영화관에서, 그리고 산책하러 나왔을 때. B는 내 발걸음에 발맞춰 걸었고 옆에서 뽀시락 거리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걸 일일이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B의 유령은 그 애가 내 곁에 있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웃기게도 B는 아예 내 옆에 없는데.
B가 도망갔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물론 만약에 B가 이 글을 본다면 그건 아니라고, 자존심이 센 애라 '그냥 너와 나는 결혼에 맞지 않는 거 같다'라고 말하겠지만.
하지만 나는 도망의 냄새와 모양을 알고 있다. 그 누구보다 더, 지독하게.
인생의 절반 넘게 집에서, 가족에게서, 교실에서, 동네에서, 구(區)에서, 도시에서 도망을 쳐 온 나에게는 B의 뒷모습이 익숙했다. 다른 말과 핑계를 덧붙였지만, B는 그저 감정이 자신을 태워버리기 전에 도망가는 소년이었다.
나는 구태여 그런 B를 잡지 않았다. 그걸 바라보고 있는 게 쉽지는 않았다. 하물며 사고 싶은 물건이 생기면 카드 빚을 내서라도 사는 게 사람인데, 사랑하는 마음만 잡은 채 B를 내버려 두는 건 나도 쉽지 않았다.
차라리 날 떠났으니까,라는 이유로 미워하거나 감정 하나 감당하지 못하는 겁쟁이라고 비난하는게 쉬웠지만 그때마다 불쑥 다가와 목덜미와 머리카락의 냄새를 맡는 B가 떠올라 그것조차도 쉽지 않았다.
한동안 B에 대해서 계속 글을 썼다. 글이라도 쓰지 않으면 나도, B도 미워할꺼 같아서. 슬픔이나 애도나, 사랑이나 총량이 있어서 그걸 소진할때까지 써 내려가면 언젠가는 다 소진되어 사라질꺼 같아서. B가 했던 사소한 말들, 행동들, 시선들, 터치들을 다 써내려가면서 그렇게 내 안의 B를 소진시켜 갔지만, 단 하나 -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웃기게도 입 밖에 내서 말 하는 순간, 겨우 잡고 있던 사소한 인연줄 마저도 사라질 것만 같아서.
하지만 그게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결국 어느 날 밤, 불이 꺼지고 모든 침묵이 깃든 밤이 되어서야 그제서 말을 꺼냈다. 인연이 아니라는걸 인정하고 싶지 않고, 말로 꺼내 인정하기 싫었지만 우리는 아니었구나. 그제서야 나도 입 밖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처음으로 꺼낼 수 있었다.
도망쳐도 괜찮아, 그냥 그 끝에서 나를 한번이라도 떠올려주면 돼. 언제까지 도망쳐도 괜찮지만 스스로에게서는 도망치지를 않기를, 네 이름 - 영광스러운 통치자 처럼 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