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봇대

by 양면테이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늦은 밤까지 사무실에 남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새벽이 되어 문을 나섰을 때, 회사 앞을 밝히던 커다란 전봇대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평소와 같은 불빛이었을 텐데, 그날따라 그 빛이 이상하리만큼 강렬하게 느껴졌다.

며칠 뒤, 같은 자리에서 다시 밤을 맞이했을 때 전봇대의 불빛은 사라지고, 하늘마저 구름에 가려 어둠이 더욱 깊어졌다. 그 순간, 문득 전봇대를 바라보며 이상한 감정이 스쳤다. 마치 전봇대가 나를 바라보며 무언가 말을 걸어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때 내 마음에 떠오른 문장은 이랬다.


"조금 어두워지는 건 괜찮아. 너는 충분히 나아갈 수 있어. 하지만 너무 어두워지면 위험해, 넘어질 수도 있어.
그러니까 적당히 어두워질 때, 내가 밝혀줄게."


나는 전봇대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었다. 인생이 힘들 때, 너무 빨리 손을 내밀어주면 스스로 일어나는 법을 배우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끝없는 어둠 속에 내버려 두면 다시 일어날 힘조차 잃어버릴 수도 있다.

나는 그때, 나를 밝혀줄 누군가가 곁에 있어주길 바랐다. 완전히 무너져버리기 전에, 누군가가 작은 빛을 내어 손을 내밀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전봇대를 그렸다.

그 빛이 너무 밝지도, 너무 어둡지도 않기를. 넘어지지 않도록, 하지만 스스로 걸어갈 수 있도록.

전봇대.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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