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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피플 Apr 18. 2020

지하철이 재밌다니, 무슨 말이야?


출퇴근 시간, 지하철은 전쟁이다. 목적지로 가는 지하철이 와도 바로 탈 수가 없다. 내리는 사람보다 타는 사람이 더 많은 기이한 현상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지하철 타는 건 최악이야."라며 불평을 품고 살았던 적도 있었다. 그러다, 그럴수록 내 마음속에 스트레스만 쌓인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러려니 산다. 이제는 2~3대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보내주고 그다음 지하철을 마음 편히 타고 있다. 사실 문제는 지하철을 타고나서 시작된다. 만원 지하철에는 사람 간의 안전거리가 없다. 자동차 간의 안전거리도 있고, 자전거 간의 안전거리도 있는데 사람 간의 안전거리가 없다니. 친한 사람도 아니고 처음 보는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고 서 있으면 숨 조차 쉬기 힘들다. 보통 지하철에 타면 눈을 감고 오늘도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길 기도할 뿐이다.


오늘은 좀 달랐다. 필름을 사기 위해 시청역 사진관으로 가는 지하철은 재밌었다. 지하철이 재밌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라고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나도 지하철이 재밌을 거라고 상상도 못 해봤으니 당연한 의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표현을 하면 좋을까? 출퇴근길 지하철을 소리조차 나지 않는 흑백영화라고 하면 시시한 여행 속 지하철은 의자가 흔들리고, 바람이 나오는 3D 영화 같았다. 지하철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사람 간의 안전거리가 있었고, 저마다의 일상이 있었다. 휴대폰을 같이 보면서 행복해하는 엄마와 아들. 등산 장비를 장착하고 유튜브를 보고 있는 아저씨. 고민이 많은 듯한 얼굴로 창 밖을 바라보는 학생, 어디서 자리가 날지 눈치를 이리저리 살피면서 언제든 튀어나갈 준비를 하는 아줌마. 특히, 6~7명의 할머니들이 한 줄로 의자에 앉아 수다를 떠는 모습은 드라마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할머니들은 정말로 오랜 시간 만나지 못했던 것 같다. 서로에게 한 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느라 할머니들의 목소리도 점점 커졌다. 나중에는 할머니들의 수다 소리 때문에 지하철에서 나는 '치키치키, 치키치키' 하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조금 시끄럽기는 했으나 할머니들이 소녀가 되어 정신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너무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다양하고 개성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기록할 수 있을지 기대되기 시작했다.


지하철에서 내리고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3주간의 긴 여행으로 옷을 제법 많이 들고 왔다. 더군다나 겨울이라 옷들의 부피가 커서 어쩔 수 없이 캐리어를 들고 왔는데. 여행을 시작하고 3시간 만에 후회를 했다. 일단,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오르기 위해서는 끌고 다니던 손잡이를 집어넣어야 한다. 손잡이를 집어넣는 게 뭐 대단한 일인가? 라고 얕잡아 보는 사람이 있다면 꼭 직접 체험해보길 권한다. 정말 대단히 힘든 일이다. 고정 장치를 풀어서 집어넣는 일을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손잡이를 부셔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아무튼 그렇게 손잡이가 들어간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하나 둘 올랐다. 계단 수가 많지 않다면 한 호흡에 읏~차! 하고 올라갈 수 있다. 그런데, 밖에서 들어오는 빛이 까마득할 정도로 높은 계단을 보니 자동으로 한숨이 나왔다. 올라갈 때마다 계단을 세다가 76개에서 세는 것을 포기했다. 그렇게, 한숨과 호흡을 번갈아가며 출입구까지 올라가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시시한 여행의 시작을 축하해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얼마나 단순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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