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관에서 나와 무작정 서울고속버스터미널로 향했다. 터미널에 도착하니 벌써 오후 4시다. "오늘 안에 서울을 떠날 순 있을까." 하고 고개를 들어 버스노선표를 보니 30분 뒤에 전주로 가는 버스가 눈에 들어왔다.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볼 수 없는 한옥이 가득한 전주를 상상하니 갑자기 설렜다. 서울이 싫은 건 아니었다. 단지, 내 일상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서울로부터 잠시 벗어나고 싶었다. 할 일, 불안한 관계, 불확실한 미래 등 일상에서 하고 있는 고민들을 버리고 온전히 시시한 여행에 집중하기 위해선 돌아갈 집이 있는 서울을 떠나야만 했다. 누가 봐도 매표소로 가는 내 발걸음은 신이 나 있었다. "어디 가세요~"라고 물어보는 무심한 직원의 말에 자신 있게 "전주"요. 라고 대답했다. 카드로 결제를 하고 버스표를 건네받을 때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출발 시간도 남아있겠다 버스에서 먹을 주전부리를 사러 갔다. 오랜만에 방문한 버스터미널의 풍경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허름한 김밥집, 우동집은 사라지고 유명한 프랜차이즈 식당, 카페들이 들어서 있었다. 심지어 편의점들은 종업원이 없는 무인 시스템으로 발전해있었다. 사업을 운영하는 입장에선 효율을 높일 수 있는 좋은 방법일 테지만, 터미널에서 느낄 수 있던 아날로그 경험들이 줄어들고 있는 것 같아 씁쓸했다. 물론 내가 IT 서비스를 기획하고 있긴 하지만 기술로 대체될 수 없는 영역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아직 터미널 구석엔 사람이 직접 운영을 하는 작은 슈퍼가 있었다. 판매하고 있는 제품들도 학창 시절에 먹던 불량식품부터 삶은 계란, 감귤까지 마음에 쏙 들었다. 그중에서도 오독오독 씹어먹는 '밭두렁'과 먹고 나면 혀가 누레지는 '맥주사탕'을 사려고 만지작 거리다 건강을 생각해서 내려두었다. 불량식품은 여행 중에 한번 더 마주치게 되면 그때 먹기로 했다. 대신, 단백질을 보충할 수 있는 삶은 계란과 비타민이 풍부한 감귤을 주전부리로 샀다.
주전부리가 담긴 봉지를 흔들면서 버스를 탈 때는 몰랐다. 버스에서 삶은 계란을 먹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유튜브에서 ~하는 방법이라고 검색하면 세상의 모든 꿀팁을 영상으로 배울 수 있다. 하지만 버스에서 삶은 계란을 먹는 방법은 유튜브뿐만 아니라 구글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버스에서 삶은 계란 먹으면 냄새 많이 날까요?" 같은 질문만 있을 뿐이다. 지금부터 세계 최초로 버스에서 삶은 계란을 먹는 방법을 알려주려고 한다. 먼저, 안전벨트를 해서 몸을 고정시킨다. 안전벨트를 하지 않으면 버스가 브레이크를 할 때 낭패를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주전부리를 담아온 봉지를 넓게 펼친다. 그리고 삶은 계란을 머리에 후려쳐 껍질에 금을 내준다. 금이 간 삶은 계란을 두 손으로 공손히 잡아 봉지 위에 놓는다. 밖으로 껍질이 튀어나가지 않도록 주의하며 까준다. 말끔히 벗겨진 삶은 계란을 봉지 위에 잠시 보관한다. 하이라이트는 바로 여기서부터다. 잊지 말고 삶은 계란에 딸려온 작은 소금을 꺼낸다. 한 손으론 삶은 계란을 들고, 한 손으론 삶은 계란 위에 소금을 톡톡 뿌려준다. 삶은 계란을 너무 공들여 먹는 것 아니냐고? 아니다. 입안의 무감각한 진공 상태가 짭짤한 소금과 쫀득한 단백질로 채워지던 그 순간, 나는 그 순간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입에서 시작된 자극이 1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온몸으로 퍼져 솜털들이 벌떡하고 일어났다. 버스를 타고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직접 체험해보길 바란다. 친구랑 함께 떠나는 여행이라면 대단한 정보라도 알려주는 양 허세를 부리면서, 버스에서 삶은 계란 먹는 방법을 전수해주는 것도 재밌는 추억이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