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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피플 May 03. 2020

눈치게임이 시작되는 시간


숙소를 게스트하우스로 잡으면 매일 아침이 눈치게임이다. 넉넉하지 않은 공용 샤워실로 인해 게스트하우스의 아침은 항상 붐빈다. 물론 아침 일찍 일어나면 다른 사람 눈치 볼 것 없이 여유롭게 샤워를 할 수 있겠지만, 여행까지 와서 피곤함을 극복하고 알람 소리에 일어날 수 있는 여행객은 얼마나 될까? 내가 그런 부지런한 여행객이 되고 싶긴 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어색한 눈인사를 나누고, 움직일 때마다 펄럭이는 비닐로 대충 가려진 공간에 들어가 샤워를 하는 일이 얼마나 당황스러운 일인지 알고 있기에. 그래서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샤워를 하겠다는 마음으로 알람을 8시로 맞췄다. 물론 어김없이 알람 소리를 듣지 못하고 10시 반까지 퍼질러 잔 게으른 여행객이 나라는 사람이다. 오늘은 시시한 여행을 시작하고 처음 맞이하는 아침이 아닌가. 공용 샤워실에 사람이 가장 많은 시간에 일어나긴 했지만, 한심한 놈 하면서 나를 혼내지는 않았다. 대신 오늘은 얼마나 당황스러운 샤워를 하게 될지 재미있는 상상을 하면서 샤워실로 걸어갔다.


적어도 내가 사는 세상에선 상상이 현실로 실현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렇다고, 윌터의 상상력을 부러워하는 것은 아니다. 상상 그대로 전개되는 세상은 지루할 테니까. 그래서 아무도 없는 공용 샤워실에 도착하곤 한참을 실실 웃었다. 얼마나 웃었을까. 동물적인 감각으로 체크아웃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곤 허겁지겁 샤워를 시작했다. 그 순간 터벅터벅 아니다 우루루루, 사람들이 단체로 몰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지나가라, 지나가라. 속으로 빌어보지만 보란 듯이 공용 샤워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친구들끼리 샤워를 하러 온 모양이다. 나는 이제 막 나가려던 참이었는데, 기가 막힌 타이밍이다. 발가벗고 나가는 길에 모르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면 서로 민망할 테니, 단체 손님들이 샤워를 시작하면 나가기로 했다. 물 세기를 줄이고 밖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사람들의 대화를 훔쳐 듣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샤워기에서 나오는 물이 비닐에 튈 정도로는 세게 틀어두었다. 밖에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을 세어보니 3명이었다. 앞으로 샤워기 3개가 작동되는 소리가 들리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역시나 내 기대는 현실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고, 밖에 있는 청년 3명은 오랜만에 동창을 만난 것처럼 폭풍 수다를 떨었다. 도대체, 샤워는 언제 할 거야? 여기가 무슨 술집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 라는 말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려 했지만 참았다. 결국 손가락이 불어날 정도로 샤워를 하고 나서야 공용 샤워실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팬티만 입고 후다닥 방으로 돌아온 나를 발견하곤, 무고한 죄를 덮어쓴 죄수처럼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마는 대단히 소심한 나는 혼자서 게스트하우스를 오면 이렇게나 눈치를 보게 된다.


그래도 방으로 돌아오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오늘 입을 새로운 옷을 꺼내 입었다. 거울을 대신해 핸드폰으로 카메라를 켜고 로션과 선크림도 발랐다. 잠을 자면서 난리를 피운 이부자리도 정리를 하고 떠날 준비를 모두 마치고 나가려는데 발코니가 보였다. 무거운 어둠을 드리우던 커튼을 걷히자 근사한 아침 풍경을 볼 수 있는 발코니가 있었다. 전주의 세월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허름한 건물들, 그 건물들 사이로 각자의 아침을 만들고 있는 전주 사람들, 그 전주 위로 떠다니는 뚱뚱한 구름들. 왜, 진작에 발코니를 발견하지 못했을까. 아쉬움은 잠시 뒤로하고, 거울로 사용하던 스마트폰을 꺼내 연신 사진을 찍었다. 가로로도 찍어보고, 세로로도 찍어보고. 확대를 해보고 감도도 조절해 가면서 찍어보지만 무언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무거워서 캐리어에 넣어버린 필름 카메라까지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렇게, 발코니에서 필름 한 롤(32장)을 모두 찍어버렸다. 지금 생각해보니 숙소를 떠나는 순간 발코니를 발견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아름다운 순간을 사진으로 담아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더욱 소중했을 것이기에. 끝이 있어 소중한 시시한 여행처럼. 죽음이 있어 비로소 의미가 생기는 우리의 인생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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