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피플 May 09. 2020

우연히 발견한 서점과 시집

평화와 평화


전주에서 무얼 할까 고민했다. 여행을 하는 동안 시집을 한 권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시는 한 줄을 읽는대도 열렬한 집중과 노력이 필요하다 보니 평소에 시를 즐기는 편은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목적이 없기 때문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지금이라면 시집 한 권 정도 읽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제대로 된 시집을 추천받아 읽고 싶은 마음에 대형서점보다는 독립서점을 찾아봤다. 마침 숙소 근처에는 평화와 평화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서점이 있었다. 내가 대단한 점쟁이는 아니지만, 분명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한 공간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책을 들고 다닐만한 작은 가방을 들고, 지도에 표시된 장소로 도착했다. 그러나, 평화와 평화라는 간판은 찾을 수 없었다. 독립서점을 운영하는 일이 쉽지는 않다고 들었지만 이 정도로 심각할 줄이야. 어쩔 수 없이 다시 대형서점으로 발걸음을 돌리려고 하던 찰나, 창문에 무엇인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동네 미술 학원에서나 볼 수 있는 그림들이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올라가 보지만 역시나 문은 굳게 닫혀있다. 그런데 문을 너머로 음악 소리와 사람들이 대화 소리가 넘어왔다. 어, 뭐지? 사무실로 누군가 사용하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으로 노크를 하고 들어가서 물어볼지 말지 한참을 고민했다. 결국, 똑똑 노크를 하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 "이제 더 이상 못 참겠다. 될 대로 되라지 뭐!" 하는 마음으로 힘차게 문을 열었다.



내 상상력으로 그릴 수 없는 공간이 나타났다. 평화와 평화는 독립서점이라는 개념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하고, 재미있는 문화 공간을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평화와 평화는 책이 전시된 공간, 카페를 운영하는 공간, 손님들이 창의적인 활동을 하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공간들은 서로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어 서로의 역할을 침범하지 않았다. 특히, 평화와 평화에 들어서자마자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손님들이 직접 그린 그림과 진심이 담긴 글이다. 오후의 햇살이 들어오는 큼직한 창문에서 펼쳐지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전시를 보는 것은 행복했다. 이것만으로도 평화와 평화에 방문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럼에도, 나는 여행을 하면서 읽을 시집 한 권을 사야 하는 사람이 아닌가. 아점으로 마실 카페라테를 한잔 주문하면서 책을 추천받을 수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주문을 받던 직원이 사인을 보내고, 구석의 테이블에서 책을 읽고 있던 사람이 일어나 걸어왔다. 알고 보니 이 독립서점에서 전문적으로 책을 읽고, 전시하는 일을 하고 있는 큐레이터라고 했다. 사실 운영상의 문제로 카페나 외적인 활동에 주력하는 독립서점들도 있다. 그러나 평화와 평화는 독립서점에서 본질인 큐레이팅에 힘을 싣고 있었다. 실제로 시집 한 권을 추천받는데 큐레이터는 나에게 굉장히 많은 것을 물어봤다. 무슨 작가를 좋아하는지, 최근에 읽은 책은 무엇인지, 좋아하는 문장이 있는지. 그러다 '빙고'하고 공감대가 형성된 산문집이 있었는데 바로 김소연의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였다. 역설적인 제목으로 독서의 의지를 불러일으키고, 평생을 바라던 낭만적인 사랑에 대해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 책이다. 당시 나는 김소연 작가가 시인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큐레이터는 나에게 김소연 작가의 시집 '수학자의 아침'을 추천했다.



평소에 좋아하던 작가의 시집을 추천받았고, 시집의 이름도 호기심을 자극할 정도로 흥미로워 바로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도서 소비 취향이 주관적이지 못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 먼저 읽어보겠다고 했다. 시를 천천히 읽고 싶은 마음에 커피도 한잔 주문했다. 한적한 오후에 시를 읽고 있으니 자유로웠다. 온전히 여행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시집의 제목으로도 쓰일 만큼 '수학자의 아침'을 읽고도 무덤덤한 마음이 '사랑과 희망의 거리'라는 시를 읽고 동했다. 이유가 뭘까. 반복해서 읽어봐도 논리적인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냥. 이 시를 읽는 동안은 가슴이 아팠다. 시인이 숨기고 싶어 하는 사랑에 대한 절박함이 내 마음에 박혔다.



사랑과 희망의 거리 _ 김소연

우리는
서로가 기억하던 그 사람인 척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빗방울에 얼굴을 내미는
식물이 되고 싶었다고 말할 뻔했을 때

너,
살면서 나는... 살면서 나는...
그런 말 좀 하지 마
죽었으면서

귀가 아프네
나는 얼굴을 바꾼다 너무 많은 얼굴들이 주렁주렁 매달린다
가면이 열리는 나무였다면
가지 끝이 축 쳐졌을 것이다
아니, 부러졌을 것이다

사실은
이해를 하고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깨로 얘기를 들어주고 있다
다가갔다 물러섰다,
빗방울이 앉았다 넓어졌다 짙어지는
우리의 어깨가
얼룩질 때

유리창 같다, 니 어깨는...
고막이 있니, 니 어깨는...

필요한 말인지
불필요한 말인지
알 길이 없는 이 말은 하지 않기로 한다

빗방울의 차이에 대해 말할 줄 아는 사람과 마주 앉아 있다
빗방울이 되어 하수구로 흘러가는 사람이 되어서



평화와 평화에서 수학자의 아침을 읽으면서 놀랬던 건 '낙서'다. 문장을 따라 쓴 흔적이나 거침없는 밑줄들을 발견했을 때 얼마난 당황했는지 모른다. 수학자의 아침만 그런가 싶어 다른 책들을 확인해보니 마찬가지다. 평화와 평화에 있는 모든 책들은 낙서가 되어 있었다. 큐레이터가 책을 읽다가 감명을 받거나, 공감하는 단어나 문장에 흔적을 남긴다고 했다. 처음에 그 소리를 듣고 "그럼, 헌책을 새책 가격에 사라는 건가?"싶었다. 그런데 읽다 보니 흔적을 남긴 큐레이터와 함께 독서를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글을 읽어 내려가다 큐레이터의 흔적이 있는 부분에서 한번 더 생각하고, 질문하고, 대답하고 있었다. 새로운 독서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본래 책을 읽을 때 흔적을 남기지 않는 편이다. 흔적을 남기게 되면 다음에 읽을 때 흔적만 읽게 될걸 걱정해서다. 그러나 평화와 평화를 다녀오고 나서 생각의 변화가 생겼다. 독서를 하면서 흔적을 남기는 일은 독서를 하는 순간의 나를 표현하는 일이라고. 책을 통해 나 자신과 혹은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다면 적극적으로 흔적을 남겨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전히 책에 흔적을 남기는 일이 익숙하진 않다. 그러나, 내 마음을 움직이는 문장을 마주하면 용기를 내어 따라 쓰고 있다. 나름 필사라고 할 수도 있을 법한 이 행동은 내가 가진 문장들도 빛나게 닦아주기도 한다.



전주에 대해 잘 몰라서 찾아간 독립서점이지만. 갈 곳이 없어서, 할 일이 없어서 찾아간 평화와 평화지만. 이제는 나에게 추억이 담긴 공간이 되었다. 서울로 돌아가서 몇 번이고 곱씹으며 일상을 위로하는 그런 소중한 공간 말이다. 그래서 평화와 평화를 떠나기 전 나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둘러보니 오래된 타자기가 있었고, 친절한 직원이 사용법을 알려주었다. 손가락으로 자음과 모음, 받침을 누르는데 글을 쓴다기보다는 만든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한 글자, 두 글자 소중히 만든 문장들을 창문 구석에 붙여두고 나왔다.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도 간혹 생각이 난다. "평화와 평화에 아직도 그때 쓴 글이 남아있으려나."


평화와 평화에 남긴 글
평화와 평화에 남긴 글

시시한 여행을 하고있다
특별함을 기대하지 않는다
우연한 행복을 기다린다

삶을 살아내기 위해
발버둥치느라 무덤덤해진
감각들이 살아나길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눈치게임이 시작되는 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