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물에 대한 열정이 없어도 너무 없는 내게. 처음으로 신세계를 경험하게 만들어준 것은 '이어폰'이었다. 지금은 편의점에서도 구매할 수 있는 흔한 아이템으로 전락했지만, 내가 중학교 때는 MP3를 가진 소수의 학생들만 누릴 수 있는 고급 제품이었다. 물론 나는 MP3가 없는 약 90%의 학생들 중 한 명이었다. 당시 나는 음악에 상당히 관심이 많았다. 친구들이 PC방에 돈을 붓는 만큼 싸이월드의 배경음악을 변경하기 위해 도토리를 구매했다. 그렇게 결제한 도토리로 MP3를 충분히 사고 남을 정도가 됐을 때, 부모님에게 MP3를 생일 선물로 받았다. 심지어 제일 잘 나간다는 삼각기둥 모양의 I-RIVER였다. 용량은 무려 128M로 노래를 30개나 넣을 수 있었다. 이제 집이 아니라 어디서든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마음껏 들을 수 있다니 너무 신이 났다. 그동안 수집해오던 노래 중 가장 좋은 녀석들로만 추려서 MP3에 옮겼다. 그리곤 두툼해서 잘 들어가지도 않던 이어폰을 귀에 꽂아 '브라운 아이즈 - 벌써 일 년'을 듣는 순간, 온 세상이 멈춰버렸다. 정말 노래를 듣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지만, "처음이라 그래 며칠 뒤엔 괜찮아져"라는 가사처럼 며칠 지나니 노래를 들으면서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었다. 오히려 귀에 이어폰이 꽂혀 있지 않으면 집중력이 떨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10년이 지난 지금 내 귀에는 콩나물이 꽂혀있다. 잠시나마 진짜 콩나물을 귀에 꽂고 있는 미친 사람을 상상했다면... 안타깝지만 당신은 신문물과 상당한 거리가 있는 나 같은 사람이다. 내 귀에 꽂힌 콩나물은 채소가 아니라 블루투스 이어폰을 말한다. 실제로 그 모양이 꼭 콩나물 대가리 같다고 사람들이 콩나물이라고 부르는데, 친환경적인 별칭이라 참 마음에 든다. 사실 나도 콩나물을 사용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최신 IT 기기에 푹 빠진 친구의 추천으로 3개월 전에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줄이 없어 여러모로 편한 구석이 있다. 특히, 실수로 줄을 건드려서 강제로 이어폰을 귀에서 뽑아버리는 고문으로부터 해방되어 좋다. 하지만, 콩나물로 귀를 막고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일상은 단조로워졌다. 모든 일상이 예상 가능했고, 반전 없는 삼류 드라마 같았다. 그렇다고 콩나물을 당장 버릴 만한 용기도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편리함이라는 안전구역 (Comfort Zone)에서 당장이라도 나가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시시한 여행만큼 좋은 핑계가 있을까? 시시한 여행이란 특별한 목적이 없는 대신 여행하는 순간을 즐기는 여행이다. 그러니 평소에는 불편한 소음이라고 생각했던 소리들도 시시한 여행을 하는 동안에는 즐거움으로 재발견될 수도 있는 것이다. 불편하더라도 여행하는 순간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 시시한 여행을 하는 동안만이라도 현재라는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고 싶었다. 그래서 시시한 여행을 시작하고 가장 먼저 '이어폰 끼지 않기'라는 규칙을 세웠다. 권장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바다의 노을을 바라보며 시티팝을 들을 수 없고, 밤바람이 들어오는 창문을 열어두고 재즈를 들을 수 없는 규칙을 추천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얼마나 작은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소리들을 흘려보내고 살았는지 알게 해 준 고마운 규칙이다.
일상에서 놓치고 있던 소리들을 처음 발견한 건 전주로 가는 버스 안이다. "Welcome to my ears!"라는 문구를 달아둔 것처럼 귀를 활짝 열어두고 버스를 타니 정말 다양한 소리가 들렸다. 우선 가장 신기했던 건 나의 숨소리와 심장소리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내 숨소리가 그렇게 거친 것을 알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되어 콧구멍을 살살 움직이면서 쉬어 보지만 숨소리를 바꾸는 것은 무리였다. 심장 소리도 예사롭지 않다. 귀에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쿵쾅대는 걸 보니 나도 아직은 건강한가 싶다. 작은 소리에 집중하니 더욱 작은 소리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할아버지가 잠잘 때 내는 힘 빠진 숨소리, 대학생으로 보이는 친구들이 속닥속닥 대화를 나누는 소리, 아주머니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통화를 하는 소리가 의자 너머로 들려온다. 이에 질세라 버스도 이런저런 소리를 낸다. 높은 턱을 지나갈 때는 버스도 힘든지 '덜컥' 하는 소리가 나고, 자갈밭을 지나갈 때는 '토돌토돌'하는 간지러운 소리를 낸다. 전주로 가는 동안 버스에서 발견한 소리 중 내가 제일 좋았던 건 깜빡이 소리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가 차선을 바꿀 일이 많지는 않아 몇 번 듣지는 못했지만, 라이트가 켜지고 꺼지기를 반복하면서 내는 깜빡깜빡 소리는 내 귀를 시원하게 긁어줬다. 엔진 소리도 은근히 듣기 좋다. 음이 이리저리 튀지 않고 규칙적으로 같은 음을 내서 듣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졸음이 쏟아진다. 그러다 버스를 추월하는 차가 슈~웅하고 소리를 내면 정신이 번쩍 든다.
그렇게, 졸다가 깨다가를 반복하고 있는데 한 남자가 운전석으로 걸어간다. 어정쩡한 포즈로 아저씨와 협상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급한 모양이다. 휴게소에 들를 예정이 없던 버스가 안성 휴게소로 들어간다. 도착 시간이 적어도 20분은 늦어질 텐데 휴게소 가는걸 누가 좋아하겠냐고 물어본다면, "바로 접니다."라고 대답할 테다. 화장실이 급해서가 아니라 음식이 급해서다. 버스에서 간식으로 먹은 삶은 계란으로는 도저히 배가 차지 않았다. 그래서 급한 볼일이 생긴 남자 덕분에 생긴 휴게소 일정이지만 나를 위한 일정처럼 즐기기로 했다. 기사님이 "20분 후에 출발할게요."라고 이야기하자마자 스낵 코너로 달려갔다. 생각해보면 휴게소가 즐거운 이유는 제한시간 덕분일지도 모른다. 제시간에 돌아가지 못하면 고속도로의 낙오자가 되거나 히치하이킹을 해야 하니 말이다. 둘 중에 무엇이든 심장이 평소보다 힘차게 움직이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만들어내기 위해 일부러 늦게 갈 수는 없는 법. 아쉽게도, 버스가 떠나기 5분 전에 도착하고 말았다. 물론 한 손에는 설탕과 케첩, 머스터드 소스가 범벅이 된 감자 핫도그를 하나 들고 있었다. 기사님은 그런 나를 보고 윙크를 하며 "맛있겠네."라고 말하셨다. 흘리지 말고 먹어요 같은 말을 하실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참 다행이다.
급해 보이던 남자가 여유를 찾고 돌아오자, 버스는 다시 출발했다. 버스도 사람도 휴게소를 다녀와서 그런지 생기가 넘친다. 귀를 기울여야 들리던 작은 소리들이 큰 소리로 변해 버스 안에 울려 퍼진다. 불편한 소음이라기보다는 편안한 백색 소음으로 다가온다. 그동안 나는 일상에서 얼마나 많은 소리들을 놓치고 있었던 걸까. 콩나물은 나를 얼마나 작은 세상에 가둬둔 것일까. 귀를 열고 보니 버스도 이만큼이나 다양하니 말이다. 여행의 본질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죽어있는 감각을 살리는 일, 내가 살아있는 존재라는 것을 느끼는 일.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뽈록 나온 배를 만지며 누워있는데,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이런 소리가 나왔다. "시시한 여행 하길 참 잘했네."
글이 아니라 음성으로 듣고 싶은 분들을 위해 준비했어요. 아래의 링크를 통해 편하게 감상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