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피플 May 24. 2020

혼술을 왜 할까요?

살얼음이 올라간 크림 생맥주


내가 처음 술을 마시게 된 건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 날이다. 앞으로 몇 년을 같이 지내게 될 것만 같은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 술에 대한 순결을 포기하고 말았다. 고등학교 친구들이 몇 번을 권유해도 절대 마시지 않았던 술인데 말이다. 솔직히 부모님이 권유하는 술이라도 내가 미성년자라면 정중히 거절했을 것이다. 그만큼 술에 대해선 상당히 보수적인 편이다. 그러나 신입생 환영회는 대학생이 된 성인들이 모여 친목을 도모하는 자리 아닌가. 용기를 내서 술을 마셨다. 내 인생에서 처음 마신 술맛이 어땠냐고 물어본다면, "죄송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해방감에 신이 나서 술을 들이부었으니 당연한 결과다. 다음날 들어보니 귀여운 척, 멋있는 척. 세상에 있는 척이란 척은 다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럼에도 그날을 후회하지 않은 이유가 하나 있다. 바로,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는 것이다. 고민을 누구보다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 사소한 일상을 공유하고 공감해주는 사람, 힘들 때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 모두 그 날 만난 고마운 사람들이다. 지금은 모두 졸업을 하고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질긴 인연은 서로의 노력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 그러다 만나서 술을 마시게 되면 어김없이 '안주'로 차려지는 신세를 면하지 못하지만, 좋은 사람들과의 술자리를 즐겁게 만들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상관없다. 보기만 해도 소주가 당기는 오뎅탕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술을 마시기 시작한 지 벌써 10년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술을 마시면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특유의 알코올 냄새도 싫고, 하루 종일 화장실에 내 몸뚱이를 가둬버리는 숙취는 말 그대로 최악이다. 나는 철저하게 사람이 좋아서 술을 마신다. 친구들과 소주 한 잔 마시면서 고민 없던 학창 시절을 추억하는 순간이 좋아서. 사랑하는 사람과 와인을 마시면서 천천히 달아오르는 기분이 좋아서 술을 마신다. 그래서 혼자 술을 마시는 사람들을 보면 호기심이 생긴다. 삼겹살이나 곱창처럼 맛있는 음식이라면 모를까. 도대체 왜, 맛도 없는 술을 혼자 마시는 걸까? 혼술을 즐기는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횡설수설하다 결국에는 이렇게 말한다. "혼술은 직접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묘한 매력이 있어." 경험에 대한 갑질이 가득 담긴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아주 약이 올라 죽겠다.


전주에서의 마지막 날. 야시장에서 저녁을 먹고 숙소로 들어가는 길. 이대로 들어가기 아쉬워 동네를 계속 돌았다. 혼자서 조용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적당한 공간이 없었다. 늦은 시간이라 카페들은 문을 닫았고, 게스트하우스는 보나 마나 파티를 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온통 나무로 가리어진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창문은 닦지 않은 건지 아니면 검은색 셀로판지로 붙인 건지는 모르겠으나 안이 보이지 않아서 퇴폐 술집인가 싶었다. 다행히도 입구에 있는 메뉴를 보니 팝콘을 공짜로 주는 평범한 술집이었다. 오랫동안 걸어서 생긴 갈증을 해결하기에도, 친구들이 말한 혼술의 묘한 매력을 경험하기에도 좋은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고양이와 놀고 있던 사장님이 고개를 까닥한다. 나도 덩달아 고개로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사장님이 말없이 건네준 메뉴판을 보니 와인, 칵테일, 소주 등 다양한 주종을 판매하고 있었다. 잔뜩 취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고, 간단히 한 잔만 하고 싶은 기분이라 생맥주를 주문했다. 살얼음이 올라간 크림 생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니 갈증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신 생맥주의 차가운 기운이 목을 타고 내려가다 말고 다시 위로 올라가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맥주를 마시다가 갑자기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내 모습이 어찌나 재밌던지 속으로 한참을 웃었다. 혼자 실실 웃으면서 맥주 한 잔을 비우고 나서 둘러보니, 사람들이 다양한 형태로 혼술을 하고 있었다. 휴대폰으로 게임 방송을 보면서 칵테일을 마시는 사람도 있었고, 손으로 턱을 괴고 사색을 하면서 소주를 마시는 사람도 있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혼술을 즐기고 있었지만, 다들 하나 같이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온전히 즐기고 있는 표정이랄까. 내친김에 혼술을 조금 더 즐기고 싶은 마음이 들어 맥주를 한 잔 더 시켰다. 오후에 독립서점에서 산 괜찮은 시집을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누가 술집에서 고상하게 시집을 읽을 거라고 상상했을까. 달아오르는 술기운에 시인의 문장들은 내 목을 졸랐고, 덕분에 더 이상 차가운 생맥주를 들이마셔도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 심지어 입에 침이 고일 정도로 맥주가 달게 느껴져 500cc 세 잔을 모두 비우고 나서야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침대에 누워 뱅글뱅글 돌아가는 천장을 보면서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직접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혼술의 묘한 매력이 뭐지?"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원하는 속도로 천천히 술을 마실 수 있어서도 아니고, 술을 마시면서 읽었던 시집이 좋아서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술집에서 나던 쿰쿰한 나무 냄새가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오랜 고민 끝에 내린 질문에 대한 답은 '자유로움'이다. 혼자서 술을 마시는 동안만큼은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게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이 혼술이 지닌 진정한 가치가 아닐까. 좋은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시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시시한 여행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도 자주는 아니지만 혼자 술을 마시곤 한다. 특히,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생기거나,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 생길 때 혼술이 정말 큰 도움이 된다. 혼술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틈만 나면 술 마실 사람들을 찾던 내가. 이제는 혼술 하기 좋은 공간을 찾아다니고 있다. 집 근처의 작은 술집도 가보고, 손님이 없는 바이닐 펍도 가봤지만 서울에서 혼술 하기 가장 좋은 곳은 한강이다. 한강에는 화려한 빌딩 숲이 반사되어 춤추는 반딧불도 있고, 작은 파도들이 부딪히면서 내는 찰랑이는 소리도 있고, 화(火)로 가득한 마음을 달래주는 시원한 바람도 있다.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 사서 한강으로 들고 가서 마시다 보면 어느새 무거운 생각과 고민들이 강물에 쓸려 내려간다. 아직도 혼술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겐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혼자 술을 마시는 것은 쓸쓸하거나 외롭지 않다고, 자유롭고 평온한 것이라고. 안 그래도 짧은 인생 주저하지 말고 당장 오늘이라도 혼술을 즐겨보자고. 반대로 이미 혼술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물어보고 싶다. 당신은 혼술을 어떻게 하느냐고, 당신이 혼술을 하는 이유는 무엇이냐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은 꽤나 맛있는 안주거리가 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원래 버스에서 이런 소리가 나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