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에서의 여행을 마치고 무작정 기차역으로 향했다. 다음 목적지도 역시나 고민 없이 느낌대로 정하기로 했다. 전주역에 도착해서 전광판을 보니 곧 여수로 가는 무궁화호가 보였다. 그 순간 밀레니얼 세대라면 다 알만한 그 노랫말이 생각났고, 마음속으로 그 노래를 만든 장범준에게 존경을 담은 박수를 치며 고민 없이 표를 샀다. 누가 들어도 유치한 이유지만 시시한 여행답다며 귀엽게 포장했다. 한껏 들뜬 마음으로 전라선 플랫폼으로 올라갔다. 5분도 지나지 않아 기차가 들어왔다. 고개를 떨구고 스마트폰을 보는 사람들, 말다툼하고 있던 연인들, 의자에 앉아 발을 동동 구르던 사람들. 다양한 모습으로 기차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들어오는 기차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무슨 목적으로 기차를 타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기차를 기다리는 마음이 간절하다는 것은 알았다. 마침 해가 기울어 노을이 지고 있었는데, 그 장면을 카메라로 담지 않고는 참을 수 없었다.
간절함을 담은 기차는 두 시간 동안 열심히 달려 여수에 도착했다. 은은하게 감돌던 붉은빛 여광은 사라지고 푸른빛 달이 밝은 밤이 찾아왔다. 고요한 밤 풍경과 달리 요란스러운 배를 보니 당장 무엇이라도 먹어야 했다. 근처에 식당이 있는지 돌아보니 '고향민속식당'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식당을 발견했다. 이름 안에 고향과 민속이라는 두 단어가 동시에 들어가 있으니 두 배로 토속적인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문을 열고 들어가니 간장게장 냄새가 났다. 반주를 하고 있던 험악한 인상의 아저씨가 나를 쳐다보았다. 그 눈빛을 애써 외면하고 두리번 거리고 있는데, 구석에 있던 사장님이 나와 자리를 안내해주었다. 짐을 풀고 자리에 앉으니 긴장이 풀렸다. 메뉴판에는 갈치조림부터 동태탕까지 해산물로 만들 수 있는 음식은 모두 적혀있었다. 메뉴를 보고 있자니 배는 더욱 요란스럽게 칭얼댔다. 고통스러운 고민 끝에 결국 나는 '간장게장'을 주문했다.
사장님은 주방에 있는 사모님에게 "간장게장 하나!"라고 크게 말하고, 냉장고로 가서 밑반찬을 준비했다. 콩나물 무침, 멸치 볶음, 시금치, 꼬막 무침, 메추리알 장조림, 콩자반 등 밑반찬만으로 밥 한 공기를 비워버렸다. 배가 부르기는커녕 이제야 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빈공기를 숟가락으로 벅벅 긁고 있는데 간장게장이 도착했다. 덩치큰 꽃게들이 통으로 잘려 있었고 그 위로는 고추와 참깨가 무심하게 올라가 있었다. 주방일을 도와주지 않는 사장님을 향한 사모님의 서운함이 담겨 있는 걸까. 무거운 생각은 잠시 뒤로 하고 눈앞에 보이는 영롱한 간장게장에 집중하기로 했다. 살이 도톰하게 오른 게장 조각을 집어 들어 입에 넣었다. 씹지도 않았는데 달콤한 살들이 입안에 퍼졌다. 약간 비린 향이 나긴 했지만 고추의 매콤한 향과 참깨의 고소한 향이 균형을 잡아 주었다. 씹을 때마다 오도독, 오도독하는 특이한 소리가 났고 껍질 속에 숨어 있던 살들이 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그러다 부서진 작은 껍질 조각이 목으로 넘어가면 캑캑거리고 기침을 했다. 마지막 남은 게장 껍질에 밥을 말아 먹고 나서야 배에서 나던 요란한 소리가 멈췄다. 현란한 젓가락질을 끝장내고 보니 게장 껍질에 돋아난 가시들로 입천장이 다 찢어져 있었다. "NO PAIN, NO GAIN"라는 말이 떠올랐는데 적절한지는 잘 모르겠다. 적어도 그날 먹은 간장게장은 내가 먹어본 간장게장 중 가장 달콤했다는건 확실하다.
행복한 식사를 마치고 사장님이 주신 믹스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는데, 험악한 인상의 아저씨는 아직도 반주를 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소주는 한 병 더 늘었다. 아저씨는 반주를 하면서 TV를 보고 있었다. 무슨 프로그램을 보고 있길래 눈을 떼지도 못하고 보고 있는 걸까. 학생들이 퀴즈를 맞히는 '도전 골든벨'이었다. 연말이라 특별편으로 감동적인 장면들을 모아서 보여주고 있었다. 부모님에게 혼나고 방으로 돌아갈 때 문을 쎄게 닫은 건 자신이 아니라 바람 때문이라며 억울해하는 귀여운 학생, 해외에서 근무를 하고 있는 부모님이 너무 보고 싶다며 눈물을 흘리는 학생, 표현이 서툴러 사랑한다고 직접 이야기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는 아버지. 부모와 자녀들이 서로를 배려하고 노력하는 모습에 흐뭇해 하다, 갑자기 부모님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났다. 사실 나는 도전 골든벨은 전국적으로 똑똑한 학생들을 뽑기 위해 경쟁을 부추기는 오디션 프로그램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이렇게 감동적인 프로그램인지는 처음 알았다.
도전 골든벨을 보면서 우는 사람은 나 말고도 한 명 더 있었다.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아저씨가 슬픔에 빠진 소년처럼 연약한 표정으로 눈물을 닦고 있었다. 물론 눈물을 닦아내는 손은 큼직하고 거칠었다. 그는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를 틀어막기 위해 간장게장을 집어 먹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간장게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홀짝거리면서 마시던 믹스 커피도 동이 낫고, 숙소도 찾아보러 나가야 하지만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 순간의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 아저씨의 눈물이 마를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저씨는 지금 누구를 생각하고 있을까. 그게 부모든, 자식이든. 이 모습을 보면 얼마나 사랑스러워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