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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피플 Jun 07. 2020

행복한 오후를 보내는 방법


내 인생을 삼 분의 일로 자르면 청소년, 대학생 그리고 직장인으로 나뉜다. 직장인 신분으로 인생을 살기 시작한 지 3년이 되었고 대부분의 오후는 회사에서 보냈다. 우리 회사의 점심시간은 한 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간단히 식사를 하고 커피 한 잔 마실 수 있는 시간이다. 그마저도 동료들과 대화를 하면서 식사를 하다 보면 점심시간이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다. 터덜터덜 무거운 발걸음으로 회사로 돌아가 자리에 앉으면 낮잠에 대한 욕구가 폭발한다. "하, 낮잠 자고 싶어 미치겠네. 누구보다 격렬하게 잘 수 있는데."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주말에는 최선을 다해 낮잠을 자겠다고 다짐을 한다.


아쉽게도 그 다짐은 한 번도 실행으로 발전된 적이 없다. 주말만 되면 만나야 하는 친구들, 해야 하는 일들, 가야 하는 장소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뒤로하고 한가롭게 낮잠이나 자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아니 두렵다고 하는 게 맞겠다. 부지런히 새로운 경험을 찾아다니지 않으면 뒤쳐지고 결국엔 버려질 수 있으니까.


전주에서 여수로 넘어와 처음 맞이한 아침. 오랜만에 기차를 타서 그런지 몸이 찌뿌둥했다. 몸을 오른쪽으로 한 번 뒹굴, 왼쪽으로 한 번 뒹굴 번갈아가면서 움직였다.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달콤한 침대에서 탈출해 아침을 먹기 위해 숙소 로비로 나갔다. 간단히 토스트를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식빵, 계란, 치즈, 베이컨이 준비되어 있었다. 숙소를 운영하고 있는 할머니가 조리 방법에 대해 알려주시는데 할머니 눈가에 있는 주름에 눈이 갔다. 식빵 하나를 들어 토스트기에 넣어두고 할머니의 우아한 주름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데 '띠링'하는 소리가 났다. 후끈 달아오른 식빵 위에 계란 두 개, 치즈 한 장, 베이컨 다섯 장을 올려 먹었다. 로비에 반쯤 내려앉은 햇살을 바라보면서 먹던 토스트는 내가 만들었지만 정말 맛있었다.


기름진 아침 식사를 마치고 소파에 누워 "행복한 오후를 보내고 싶은데 무얼 하면 좋을까?"라는 고민을 했다. 주인 할머니가 추천한 해양 박물관을 갈까, 해상 케이블카를 타러 갈까. 저울질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낮잠이 튀어 올랐다. 시시한 여행은 특별한 경험을 바라고 시작한 것이 아니고, 3년 동안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낮잠을 즐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렇다고 방금 일어났는데 지금 당장 들어가서 낮잠을 잘 수는 없었다. 결국 동네를 한 바퀴 산책하고 낮잠을 자는 것으로 협상을 했다.


숙소를 나서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전깃줄이었다. 말 그대로 여수는 전깃줄로 짜인 세상이었다. 파도 모양으로 길게 늘어진 전깃줄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니 절로 신이 났다. 리드미컬한 재즈를 듣는 것처럼 고개를 까닥거리며 걸어 다녔다. 장인들이 직접 올라가 페인트로 그린 것 같은 큰 글씨가 박힌 건물들도 있었다. 저 마다 다른 디자인을 가지고 있었고, 글씨의 바랜 정도를 보니 지나온 세월도 모두 달랐다. 낡은 건물들 아래로 촌스러운 하늘색 버스 한 대가 정거장에 멈춰있다. 한 명이라도 더 태우고, 한 바퀴라도 더 돌아야 하는 버스가 노인들이 안전하게 탈 수 있도록 기다린다. 일사천리로 지나가는 서울의 아침과는 완연히 다른 모습이다.


한 시간 정도 걸었을까.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쉬고 있는 작은 공원을 발견했다. 나는 망울만 맺히고 아직 피지 않은 동백꽃 옆에 그늘진 의자에 앉았다. 강렬한 햇빛으로 피곤해진 눈을 잠시 붙이고 꽃봉오리에서 나는 은은한 향기에 집중했다. 코를 타고 넘어오는 향이 몸을 적시니 갑자기 졸음이 쏟아졌다. 사람들이 모여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볼까 했지만, 당장 낮잠을 자지 않으면 심장이 멈춰버릴 것 같아 실만큼 뜬 눈을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오전 11시, 숙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올라가 대(大) 자로 누웠다. 전기장판을 최고 단계인 5단계까지 틀었다. 일분도 지나지 않아 등이 뜨거워졌다. 이대로 잠들면 땀 때문에 중간에 잠에서 깰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덮고 있던 이불을 발로 뻥 차서 걷어냈다. 반만 덮고 옆으로 누우니 살 것 같았다. 살짝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겨울바람에 체온의 균형이 맞춰졌다. 그런데도 나는 가만히 있지 못했다. 살갗이 이불에 닿을 때마다 느껴지는 간질거리는 촉감과 바슬거리는 소리가 좋아서. 낙엽 뭉치에서 꿈틀거리는 지렁이처럼 춤을 췄다. 그러고 있는 내 모습이 어이가 없어서 한참을 웃다 잠이 들었다. 중간에 깨지도 않고, 꿈을 꾸지도 않았다. 그렇게 평온한 상태로 5시간을 자고 일어나니 몸이 가뜬해졌다. 무겁던 눈꺼풀이 가벼워지고, 욱신대던 다리의 근육통이 사라지고, 막혀있던 한쪽 콧구멍이 뻥 뚫렸다. 괜한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보다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오늘 오후는 누구보다 행복하게 보냈다는 자신감, 앞으로의 시시한 여행도 온전히 즐길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 일상으로 돌아가도 나를 잃어버리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 같은 것들 말이다. 덕분에 5시간 정도 새로운 경험을 하지 않는다고 뒤쳐지지도 않고 버려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오히려, 5시간의 낮잠은 몸도 마음도 지친 나에게 새로운 경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이자 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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