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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피플 Jun 13. 2020

바다를 좋아하는 이유

천사벽화마을


시시한 여행을 시작하고 바다를 볼 수 있는 지역은 여수가 처음이었다.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일어나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숙소 사장님에게 물었다. "여수 바다를 제일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곳이 어디예요?" 사장님은 질문을 듣고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고민하시더니 천사벽화마을을 추천했다. 그리고 필름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내가 좋아할 만한 곳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내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신 이유가 뭘까? 마음 한켠에 작은 호기심을 올려두고 바다로 출발했다. 버스로 가면 10분이면 가는 거리를 한 시간 동안 걸었다. 두 다리를 힘차게 들어 옮긴 발걸음만큼 마음도 가벼워졌다.


천사벽화마을에 도착하자 사장님이 내게 이 장소를 추천해준 이유를 단번에 알았다. 천사벽화마을에는 필름 카메라로 담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 정말 많았다. 주황색 지붕 옆에 파란색 지붕이 있었고, 행복한 표정의 가족을 그린 벽화가 있었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에게 꼬리를 흔들어대는 귀여운 강아지가 있었고, 무엇보다 바다를 주위로 피어난 작은 마을을 볼 수 있어 좋았다. 그 풍경들을 필름 카메라로 담으면서 "이런 데서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라는 행복한 상상을 했다. 본격적으로 마을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행복, 평온, 사랑, 기대 같은 밝은 감정들만 가득한 마을인 것 같았다. 그러나 마을 깊숙이 들어갈수록 불행, 불안, 이별, 좌절 같은 어두운 감정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단단한 쇠 자물쇠로 잠긴 철문을 보았고, 오래되어 바래진 낡은 벽화들도 보았다. 그러다 사람의 온기가 닿지 않아 거센 가시덤불로 메워진 집을 보고 목구멍이 턱 막혔다. 더 이상 사진을 찍고 싶지 않아 필름 카메라를 가방에 넣고 발걸음을 돌렸다.


카페 여수에서


꼬불 꼬불한 언덕을 내려가는데 멀리서 음악 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음악 소리를 따라 걷고 있었고, '여수에서'라고 적힌 파란색 문 앞에 도착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는데도 '끼익'하는 큰 소리가 났다. 오래된 가옥을 개조해서 운영하는 카페였다. 벽화마을에 카페가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시시한 여행을 할수록 우연을 붙잡아 행운으로 만드는 능력이 발전했다. 마침 오랜 시간 걸어서 체력이 바닥나기도 했고, 배에서 곪는 소리가 나던 참이라 따뜻한 라떼를 주문했다. 앉을자리를 찾기 위해 둘러보니 노란 전구가 달린 큰 창문이 있었다. 푸른 바다를 보면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창문 자리는 인기가 많았다. 돈을 더 주고서라도 앉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사장님과 수다를 떨 생각으로 카운터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전주에서 사 온 시집을 꺼내 읽다가 사장님이 심심해 보일 때를 기회 삼아 말을 걸었다. 사장님은 길게 늘어진 머리를 무심하게 손으로 넘기면서 모든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했다. 배에서 올라오는 중저음의 목소리는 사장님의 말에 힘을 실어주었고, 내 사람들과 다시 한번 오고 싶은 카페라는 마음이 들었다.


즐거운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창문 자리가 비었다. 사장님에게 인사를 하고 창문 자리로 옮겨 본격적으로 바다를 보기 시작했다. 해질녘 바다에는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배가 많았다. 배가 바다를 가르고 지나가면 큰 파도가 생겼고, 햇빛은 그 파도의 면을 따라 부서졌다. 부서지는 빛을 보고 있으면 눈은 부셨지만 계속 보게 되었다. 한참 빛 멍을 때리고 있다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로 갈매기가 지나가면 그제야 다시 초점이 잡혔다. 책도 읽지 않고, 말도 하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해가 지고 여광이 사라질 때까지 바다를 보고 있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오랜 시간 바다만 보고 있었던 순간이자 최근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죽을 만큼 사랑하는 인연도 아닌데 바라만 보고 있어도 바다가 좋은 이유는 무엇일까?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일 년간 보성에서 살았다. 친구들이 유치원에서 한글을 배우고 있을 때 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자연을 배웠다. 밭에 나가서 내 키보다 큰 옥수수 밭을 뛰어다니고, 가재 하나를 잡기 위해 개울에 있는 모든 돌을 다 해치고 다녔다. 그중에서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자연은 바다였다. 그 시절 나는 바다로 노래를 만들어서 부르고 다닐 정도였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매일 같이 바다를 가자고 졸랐다. 씻지도 못해 땀에 절은 할아버지가 미안하다고 거절을 하면 입을 삐죽 내밀고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물론 작은방에 혼자 있으면 귀신이 나타날까 봐 10분도 안돼서 할머니에게 달려갔지만, 바다를 가고 싶다는 내 나름의 표현이었다. 그러다 농사일이 잠잠한 날이면 할아버지는 경운기에 시동을 걸고 나를 불렀다. "바다 가자, 인아." 그럼 나는 신이 나서 검은색 고무신을 신고 경운기에 올라탔다. 할아버지가 운전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경운기 앞에 바짝 붙어 앉았다. 울퉁불퉁한 홈이 파인 바퀴가 굴러갈 때마다 덜컹거리는 바람에 내 엉덩이는 춤을 추는데, 할아버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시속은 20KM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할아버지의 경운기는 페라리만큼 빨랐다. 30분 정도를 열심히 달리다 보면 논밭의 소똥 냄새가 비릿한 냄새로 변했는데, 그 순간이 참 좋았다. 그토록 기다리던 바다가 손에 잡힐 정도로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바다에 도착하면 할아버지는 주차를 하고 나는 해수욕장으로 달려갔다. 고무신을 모래사장에 벗어두고 바다에 들어가 놀고 있으면 할아버지는 튜브를 빌려왔다. 튜브를 타고 파도를 넘어 바다를 유랑하고, 바다에 무슨 생물이 사는지 궁금해 잠수를 하고, 튀어 오르는 물고기를 잡겠다고 난리를 피웠다. 나는 그렇게 2시간은 놀아야 체력이 바닥이 났고, 할아버지는 말없이 기다려주셨다. 이제는 할아버지가 무슨 표정으로 나를 기다리셨는지 기억나지도 않고, 물어볼 수도 없다. 그러나 내가 바다를 이토록 사랑하는 이유는 분명 할아버지 때문이다. 바다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셨으니까.


카페에서 바라본 바다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 내가 바다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친구들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바다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얼마나 있을까? 그리고 바다를 좋아한다면 왜 좋아할까? 그래서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바다 사진과 함께 '바다를 왜 좋아해요?"라고 올렸다. 생각보다 많은 친구들이 바다를 좋아한다고 답변을 달았고, 그 이유가 저마다 너무 달라 신선했다.


제주에 살고 있는 A의 답장 : 제주 사람이 바다를 좋아하지 않을 리 없죠. 저는 바다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형태를 좋아해요.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건 해질녘 바다예요. 바다에 깔린 윤슬이 전날 밤에 지지 못한 별들을 대신해 빛나는 것 같아 하루를 위로해주는 기분이 들어요.

서울에 살고 있는 포항 출신 B의 답장 : 바다 근처에 살 때는 바다가 귀한지 몰랐어요. 20살이 되고 서울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바다 유전자가 있는 사람처럼 바다를 그리워했어요. 그래서 마음이 답답하고 힘들 때면 바다를 보러 가요. 잔잔한 바다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엉킨 실타래가 풀리는 기분이 들어요.

수원에 살고 있는 C의 답장 : 어? 나 바다 왔는지 어떻게 알았어요? 음, 나는 바다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 같아요. 내가 원하면 수영을 할 수도 있고, 낚시를 할 수도 있고, 지금처럼 바라만 볼 수도 있어서 좋아요. 내게 무엇도 강요하지 않지만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받아주니까. 그래서 바다가 좋아요.

서울에 살고 있는 D의 답장 : 마음을 비우고 싶을 땐 바다로, 마음을 채우고 싶을 땐 산으로.


바다에 대한 생각을 정성스레 글로 보내주어 고마웠다.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바다가 더욱 좋아졌다. 내가 있는 위치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시선으로 바다를 풀어내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내가 바다를 매일 간다고 해서 바다에서 자란 A와 B 같이 생각하지 못할 테고, 바다를 주제로 다룬 시를 수십 번 본다고 C나 D처럼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 내서 질문했고 귀를 열고 이야기를 들었다. 결국 인터넷으로 검색하지 않고도, 책을 읽지 않고도 바다가 가진 새로운 모습을 보았다. 매번 스스로 질문하고 결론 내리기를 좋아하는 나는 몰랐다. 바다가 어두워지고 나서야 좋아하는 것은 표면으로 드러내고 대화를 나눌수록 깊어진다는 말을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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