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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피플 Jul 05. 2020

조금은 영화 같은 하루

오일장을 마지막으로 여수에서의 여행은 끝났다. 그 순간까지 다음 행선지를 정하지 않았다. 천천히 숙소에서 짐을 챙기고 나와 여수엑스포역으로 갔다. 10분 후에 순천으로 출발하는 KTX가 있었다. 순천이라는 글자를 보니 숙소에서 만난 사람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순천만이 떠올랐다. 순천만은 한국에서 가장 넓은 면적의 갈대밭이라며 꼭 가보라고 했다. 순천만이 궁금하기보다는 KTX가 더 궁금했다. 주야장천 무궁화호만 탔으니 이제는 KTX로 보상을 해줘야 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순천으로 가는 KTX를 기다리고 있는데 폭풍을 가르고도 달릴 수 있을 정도로 날렵하게 생긴 빨간색 기차가 들어왔다. 내가 타고 갈 KTX였다. 평평하고 못생긴 로봇을 닮은 무궁화호와는 클래스가 달랐다. 그러나 KTX 올라 자리에 앉아보니 다리를 제대로 펼 수 없는 좌석은 똑같았다. 화장실을 가보니 흰색 플라스틱에 쇠로 된 변기도 무궁화호와 다른 점이 없었다. 다만, KTX에는 승객들의 자리마다 KTX 잡지가 자랑스럽게 꽂혀있었다. 괜한 기대가 높았던 탓에 실망을 하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실속 없던 KTX를 타고 20분을 달리니 순천역에 도착했다. 순천역에 도착하면 순천만이 바로 보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상상과 달리 순천만은 버스를 타고 한 시간을 더 가야 했다.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정류장에는 순천만을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버스가 도착하자마자 사람들은 우르르 탑승하기 시작했고, 내가 타기도 전에 버스는 이미 만석이 되었다. 도저히 캐리어를 들고 탈 수 없을 것 같아 택시를 타기로 했다. 순천역 앞에는 나 같은 버스 낙오자 손님들을 태우기 위한 택시들이 많았다. 오른손을 하늘 높이 들고 휘저으니 반대편에서 대기하고 있던 택시 한 대가 유턴을 해서 돌아왔다. 택시 창문이 열리자 기사님의 온화한 미소가 보였다. "순천만 가시죠?" 친절한 기사님의 질문에 "네~ 어떻게 아셨어요?"라고 대답하며 택시에 올라탔다. 20년 경력을 가지고 있다던 택시 기사님은 손님들이 서 있는 방향만 봐도 목적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장난스럽게 이야기하셨지만 왠지 모르게 신뢰가 갔다. 그렇게 기사님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푹신한 의자에 고개를 젖히고 누웠다. 창문을 반 정도 열어두고 눈을 감으니 몸과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무가 터널처럼 자라난 도로에선 산에서 나는 초록 냄새가 났다. 분명히 눈은 감고 있었지만 도로 위 풍경이 선하게 그려졌다. 너무 편안한 나머지 잠깐 잠이 들었는데 낮잠을 푹 잔 것처럼 개운했다. 한껏 가벼워진 눈꺼풀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순천만 습지라고 적힌 큰 간판이 보였다. 기사님은 "잘 주무셨어요?"라고 말하며 천천히 차를 세워주셨다.


매표소에 도착하니 순천만 입장은 5시까지만 가능하다고 했다. 당시 시간이 4시 30분 정도로 버스를 타고 왔다면 입장조차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입장을 하고 나선 일몰까지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놀란 마음을 쓸어내리고 표를 사서 입구로 걸어갔다. 직원에게 표를 보여주고 들어가려던 찰나에 입구 옆에 있는 물품보관소를 발견했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물품보관소에 있는 사물함들은 100원짜리 동전을 보증금으로 넣으면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100원짜리 동전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지폐를 동전으로 교환해주는 자판기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동전은커녕 천 원짜리 지폐 한 장도 없었다. 주변을 둘러봐도 ATM기는 보이지 않았다. 입장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아 멀리 보이는 편의점까지 다녀 올 수도 없었다.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표를 검사하던 직원분이 손을 내밀어 100원짜리 동전을 주셨다. 나 같은 사람들이 혹시 있을지 몰라 준비한 100원짜리 동전이라고 했다. 한 사람을 위한 동전이 아니라 공용으로 사용하는 동전이니, 순천만을 떠날 때 동전교환기 위에 100원짜리 동전을 다시 올려두라고 당부했다. 나는 최대한 눈을 똘망똘망하게 만들어 직원을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알겠어요. 100원은 잊지 않고 꼭 동전교환기 위에 올려두고 갈게요. 정말 감사해요."


순천만에 들어가니 철새들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울림통이 크고, 시원한 소리를 내는 걸 보니 덩치가 큰 새 같았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니 검은색 날개를 우아하게 펄럭거리는 흑두루미 떼가 있었다. 마치 빛이 들어오는 밝은 바닷속을 수영하는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녔다. 하늘, 바람, 노을, 안개, 흑두루미... 자연과 동물이 조화를 이루고 살아가는 공간은 아름다웠다. 그 공간의 아름다움을 카메라로 담고 있는 아저씨가 있었다. 대포처럼 큰 카메라와 튼튼한 삼각대를 보니 전문적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 같았다. 조용히 다가가 인사를 하니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알고 보니 아저씨는 근처에 사는 동네 주민이었고 겨울만 되면 매일같이 철새들을 찍으러 온다고 했다. 그래서 본인은 잠을 잘 때도 흑두루미의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농담을 하셨다. 동네 아저씨가 찍은 흑두루미는 전문 포토그래퍼가 찍은 사진만큼 생동감 넘쳤다. 검은색으로 물든 깃털에는 윤기가 흘렀고, 힘차게 펄럭거리는 날개는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흑두루미 사진을 넘기다 보니 작고 귀여운 오리들도 있었다. 아저씨는 순천만 갈대밭에는 짱둥어 같은 먹이가 많을 뿐만 아니라 천적으로부터 숨을 수도 있어 다양한 종류의 철새들이 찾아온다고 했다. 나도 순천만의 아름다움을 담기 위해 필름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아저씨와 함께 사진을 찍고 있는데 트럭 한 대가 들어왔다. 트럭에는 대포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저씨의 친구들이었다. 흑두루미를 찍기 위해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고 했다. 아저씨는 같이 가자고 권유해주셨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순천만을 조금 더 느긋하게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저씨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갈대밭 안으로 들어갔다.


붉은빛이 도는 하늘 아래. 사람 키보다 높게 뻗은 갈대밭 안으로 들어오니 잠시 동안 숨이 막혔다. 순천만 갈대밭은 나의 시선에 따라 전혀 다른 풍경을 보여줬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노을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동네산이 있었다. 그 산에는 낙엽이 떨어지고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나무들이 가득했다. 고개를 반대로 돌리면 파란색 고기잡이 배가 정박한 작은 부두가 있었다. 부두 근처에는 울음소리가 제일 큰 대장 오리를 중심으로 무리 지어 사냥을 하고 있었다.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보면 철새들이 서로가 약속한 위치를 유지하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실제로 순천만에 와보지 않았다면, 한 공간에서 볼 수 있는 풍경들이라고 믿지 않았을 것 같다. 더불어 순천만을 방문한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다. 갈대밭과 어울리는 옷을 맞춰 입고 손잡고 산책하는 연인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서로 눈을 떼지 못하고 수다를 떠는 친구들, 오랜만에 여행인지 어색한 표정으로 단체사진을 찍고 있는 가족들. 서로가 다른 방식으로 소중한 추억을 만들고 있었지만 그들의 입가에 번진 미소엔 행복이 담겨있었다. 좋은 곳에 가면 사랑하는 사람이 생각난다는 말이 그 순간 실감 났다. 분명히 혼자 여행을 하면 편하고, 좋은 점도 많지만, 순천만은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오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몽글몽글해진 마음을 뒤로하고 갈대밭을 나오는 길에 시를 하나 발견했다. 나무로 된 촌스러운 판자 위에 적힌 시는 내 마음을 완전히 무장해제시켰다.


갈목비 _ 송수권

대대갈밭 눈이 내린다
샛강으로 가는 갈밭 사잇길 하모니카 소리 들린다
머나먼 스와니 강물을 이끌고 그녀가 왔다
내리는 눈발 속에서 갈목을 뽑으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함론 묘지공원 묘비가 꽂혀 있는 그녀의 무덤
그곳에 눈이 내리면 이곳에도 눈이 내리는 걸까
사이드레거라는 예쁜 이름의 병을 얻어
외로운 병실에서 그녀는 죽어갔다 한다
뻘강을 건너 우리는 그녀가 없는 세계의 정원으로 간다
흰 튤립과 백합이 핀 네덜란드의 정원을 지나
그녀의 침실이 있는 바로크식 독일 정원으로 간다
인부들의 눈 치는 삽질소리가 맑게 들린다
쾰른의 흑맥주를 즐겨 마신다던 그녀의 음성 위에
오늘은 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하며 흰 눈이 내린다
겨울 철새들이 들판 가득 날아내린다


순천만을 떠나려고 하니 해가 지고, 동그란 보름달이 떴다. 다시 무거운 몸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사물함에서 캐리어를 꺼내고 문을 닫으니 100원짜리 동전이 나왔다. 코에서 새어 나오는 바람 소리가 귀에 들릴 정도로 큰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정말로 목적 없이, 정처 없이 왔지만 순천만에 있었던 모든 순간이 행복했다. 수북이 먼지가 쌓인 동전교환기 위에 동전을 올려두고 돌아서니 이런 생각이 났다. "다음 주인공은 누가 될까." 조금은 영화 같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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