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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피플 Jul 18. 2020

사람 구경을 넘어 기록까지

시시한 여행을 하고 있는데 알고 지내던 형에게 전화 한 통이 왔다. 목적 없이 여행을 하고 있다고 하니 구체적으로 물어봤다. 왜 시시한 여행을 시작했는지, 시시한 여행을 통해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무슨 글을 쓰고 싶은지. 누구도 물어봐주지 않았던 시시한 여행에 대해 물어봐준 형에게 참 고마웠다. 그래서 모든 질문에 정성스럽게 답변했다.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변이 끝나기도 전에 형은 "나도 같이 하고 싶어."라고 말했다. 잠시 고민을 하다 거절했다. 시시한 여행은 현재의 순간에 집중해서 사소한 행복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한데, 누군가 같이 여행을 하면 그 사람을 생각하고 배려하느라 현재의 순간에 집중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내 성격을 잘 알고 있는 형도 그런 나를 이해했다. 대신 전라남도를 가게 된다면 완도에 가보라고 했다. 관광으로 유명한 지역은 아니지만, 해안선을 따라 형성된 마을이 아름답다고 말했다. 나는 청량한 바다와 평화로운 시골 풍경을 경험할 수 있다는 말에 속아 순천 버스터미널에서 완도 가는 버스표를 샀다.


완도로 무작정 가긴 했지만, 정말로 뭐가 없었다. 버스터미널을 나와서 보니 식당과 노래방 몇 개가 전부였다. 그 마저도 모두 문을 닫아서 길거리는 말 그대로 황량했다. 근처에 있는 모텔에서 대충 하루를 보내볼까 했지만 이내 무서운 상상의 나래가 펼쳐져 안전한 숙소를 찾기 시작했다. 노란색 검색창에 [완도 게스트하우스]라고 입력하니 검색 결과가 딱 하나 나왔다. 보통은 수도 없이 많은 검색 결과 중에 하나를 선택하느라 고민인데, 완도에서는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남아있는 자리가 없으면 어떡하지?" "정말 모텔에서 자야 하나?" "무슨 일이야 생기겠어.." 같은 걱정들을 품고 게스트하우스에 전화를 했다. 뚜루루루~ 뚜루루루~ 통화 연결음이 넘어가고 사장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인도에 표류된 사람이 여러 번의 시도 끝에 구조대와 통화가 연결된다면 이런 느낌일까. 사장님은 마침 한자리가 남았다고 말했고, 나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음침한 저녁이 지나가고 평온한 아침이 찾아왔다. 침대에 누워서 빛이 들어오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니 큰 창문이 하나 보였다. 파란색의 널따란 커튼 하나로는 큰 창을 모두 가릴 수 없었고, 그 사이로 따뜻한 햇살이 들어왔다. 한동안 기분 좋은 햇살을 이불 삼아 뒹굴거리다 노트북을 들고 로비로 내려갔다. 숙소 로비를 카페로 운영하고 있어 동네 주민들이 많았다. 부스스한 머리는 그대로 두고 눈곱만 떼고 내려온 나를 발견한 사장님은 반갑게 말을 건넸다. 지난밤 잠은 잘 잤는지, 오늘은 무엇을 할 것인지. 서로 안부를 간단히 나누고 아침 겸 점심으로 마실 라테를 주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따뜻한 우유 거품이 올라간 라테가 나왔고, 나는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라테를 들고 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 창가 자리에 앉아 라테를 홀짝거리면서 그동안 여행하면서 경험한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노트북에선 타자를 칠 때마다 경쾌한 소리가 났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고 창가 넘어 풍경을 보는데 횡단보도가 눈에 들어왔다. 횡단보도에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모양으로 녹색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순간 작년에 재미있게 읽었던 <부드러운 거리>라는 책이 떠올랐다.



나는 종종 모험을 하기 위해 대형서점에 간다.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좋은 책을 발견하는 모험이다. 구석진 책장에 숨겨진 제목들을 찾아 읽고, 표지 위에 올라간 오래된 먼지를 툭툭 털다 보면 어느샌가 좋은 책을 발견하게 된다. <부드러운 거리>도 대형서점에서의 모험을 통해 발견한 책 중 하나다. <부드러운 거리>는 정인하 작가가 서울이라는 대도시 사람들을 관찰하고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책이다. 정인하 작가는 횡단보도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 서울 사람들을 관찰했다고 말했다. 관찰을 하는 사람과 관찰을 당하는 사람이 모두 불편하지 않기 위해선 너무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거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인하 작가가 표현한 서울 사람들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저마다 다른 모양을 하고 있었다. <부드러운 거리>를 읽는 내내 일상 속 거리에서 놓치고 있던 흥미로운 사람들을 몇 번이고 만났다. 책을 완독하고 나니 작은 소망이 하나 생겼다. 횡단보도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 여유롭게 커피를 홀짝거리며,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나만의 언어로 기록하는 것. 아쉽게도 서울에선 이 작은 소망을 이루기가 쉽지 않았다. 카페를 간다는 것은 작업을 하거나 사람을 만난다는 것을 의미하고, 횡단보도가 보이는 카페는 서울 밤하늘에서 별을 찾는 일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숙소 로비 카페 앞에는 횡단보도가 있었다. 너무 멀지도 않고, 너무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 있었다. 눈을 크게 뜨고 보면 사람들의 표정까지 관찰할 수 있었지만, 적당한 거리 덕분에 사람들은 내가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 조차 몰랐다. 시시한 여행 중에 우연히 찾아온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나는 노트북 뚜껑을 닫고, 노트와 펜을 집어 들었다. 완도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무슨 옷을 입고 있을까? 어떻게 걸어 다닐까? 완도 사람에 대한 호기심은 폭발했고, 나는 고개를 들어서 사람들을 관찰하고 다시 고개를 내려서 관찰한 사람들을 기록하기를 수 없이 반복했다. 첫 번째 관찰대상은 뽀글이 파마가 풀린 할머니다. 동네 미용실을 간지 한참 됐는지, 오른쪽 머리의 풀이 죽었다. 할머니는 무거워 보이는 보라색 가방도 부족해서, 무엇인가 가득 들어있는 검은색 봉지를 들고 뒤뚱뒤뚱 횡단보도를 건너셨다. 반대편엔 검은색 재킷, 검은색 바지, 검은색 모자를 세트로 입고 있는 할아버지가 보였다. 할아버지는 신호등이 몇 번이고 바뀌는데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았다. 그저 주머니에 두 손을 집어넣고 같은 자리를 빙빙 돌아다닐 뿐이다. 그러다 똑같은 스타일로 입고 나온 친구 두 명이 나타나 반갑게 악수를 하고 나서야 횡단보도를 건너셨다. 배가 볼록하고 나온 중년의 남성도 있었다. 양팔을 골반에 대고 늠름한 포즈로 신호를 기다렸고, 신호가 바뀌자 손바닥을 피고 양팔을 휘휘 저으면서 걷는 모양이 귀여워서 피식하고 웃음이 났다. 차도로 시선을 옮기니 강렬한 주황색 패딩을 입은 배달원이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에 내리쬐는 햇빛 때문인지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내 미관도 배달원을 따라 찌푸려졌다. 횡단보도를 한참 보고 있는데 민트색 저지를 입은 학생이 자전거를 타고 나타났다. 스포츠머리를 하고, 뿔테 안경을 쓰고 있던 그 학생은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자전거에서 내려 얌전히 기다렸다. 차도 없고, 사람도 없는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잘 지키는 모습을 보고 내가 괜히 뿌듯했다. 그러나, 한참을 보고 있어도 스마트폰을 보면서 걸어 다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서울에선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떨구고 스마트폰을 보면서 걷는데 말이다. 완도 사람들은 고개를 꼿꼿이 들고 앞을 보면서 걸었다. 나이가 들어 허리가 굽은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시선만큼은 앞을 향해 있었다.


정신없이 사람 구경을 하다 보니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반나절을 넘게 쉬지도 않고 사람 구경을 했지만 시간 가는지도 몰랐다.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이 무슨 옷을 입고 있는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를 자세히 관찰하고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어휘를 사용해 글로 사람들의 개성을 표현해내는 일은 생각보다 더 낭만적이었다. 마치 유럽여행을 하면서 종종 발견하던 거리의 화가가 되어 그림을 그리고 있는 기분이랄까. 덕분에 화가들이 사람들을 그리는 이유도 사실은 내가 사람들을 글로 표현하는 이유와 비슷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을 보면서 느끼고 있는 여러 가지 감정들을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서, 현재의 순간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추억하기 위해서 자기만의 방식대로 기록하고 있는 건 아닐까. 어쩌면 지금 내가 완도 사람들을 기록한 글을 보고 그날을 추억하고 있는 것처럼, 유럽의 화가들도 나를 그린 그림을 보고 그날을 추억하고 있진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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