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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피플 Apr 15. 2020

여유로운 출발

돼지우리 같은 나의 집


보통 여행을 출발하는 아침의 모습은 어떨까?


평소에 그렇게 듣기 싫던 알람 소리가 울리자마자 벌떡 일어난다. 샤워실로 달려가 한 손으로 머리를 감으면서 다른 한 손으론 양치를 한다. 그리고 수건으로 대충 휙휙 몸을 닦아내고 어제 준비한 옷을 입고 머리를 말리기 시작한다. 머리는 말리고 있지만 눈은 스마트폰을 떠나지 못한다. 여행지로 출발하는 버스, 기차가 제대로 예약되어 있는지 지금 내가 늦은 건 아닌지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동시에 손, 발, 눈, 입을 사용할 수 있는 나 자신이 대견스럽기도 하지만 참 정신없는 아침이라는 생각도 든다. 여행을 출발하는 아침이 여유로울 순 없을까?


시시한 여행을 출발하는 아침은 달랐다. 알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오늘 안에 출발하기만 하면 될 뿐, 특정한 장소로 언제까지 갈 필요가 없었다. 덕분에 창문의 작은 틈으로 들어오는 강렬한 햇빛을 보고 아침을 시작할 수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좋아하는 음악을 트는 일이었다. Lauv - Paris In the Rain, 살아있는 음표가 떨어지는 듯한 신디사이저 소리가 났다. 조용히 앉아있던 먼지들이 내가 움직일 때마다 튀어 오르는 모습과 잘 어울렸다. 음악과 먼지로 가득한 방구석에 서 있으니 발은 동동거리고 어깨가 들썩거렸다. 신이 나서 춤을 한번 춰 볼까 했지만 끔찍할 정도로 민망할 내 모습에 그만뒀다. 대신, 화장실 안이 음악 소리로 가득할 만큼 크게 틀고 춤을 추듯 신나게 샤워를 했다. 평소에 시간이 없어 못하던 린스까지 하고 나오니 시간은 벌써 오전 11시가 됐다. 특별한 여행을 가는 날이라면 늦장 부린 나를 자책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그러나 오늘은 시시한 여행을 떠나는 날이 아닌가. 조금 늦게 출발해도 나를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여행을 하면서 입을 옷을 빨아 놓지 않은 것은 실수였다. 어쩔 수 없이 나의 첫 번째 여행지는 빨래방이 되었다.


바닥에 뒹굴거리던 옷들을 대충 구겨서 캐리어에 집어넣고 집을 나서려던 순간, 돼지우리 같은 집이 눈에 밟혀 도저히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회사를 가는 길이거나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닫았을 텐데. 당분간 집으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을 떠나는 길이라 문을 닫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들고 있던 캐리어를 현관에 내려놓고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미뤄둔 설거지를 하고, 바닥의 먼지를 쓸고 걸레질을 했다. 침대 구석에 박힌 옷들을 가지런히 개어서 옷장에 넣어두고, 먼지 쌓인 책들도 한 번씩 털어서 다시 서랍에 올려두었다. 평소에는 귀찮았던 청소가 왜 이리도 즐거웠을까.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청소를 했다. 모든 청소를 마치고 다시 짐을 들고 집을 나서려고 하는데, 마음이 아련하다. 반려동물을 두고 집을 나서는 마음이 이런 걸까. 유난히 사람, 사랑 때문에 고생한 시기를  같이 보낸 공간이라 그럴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작지만 내 방이라는 공간 덕분에 한해를 잘 버틸 수 있었다. 무거운 마음을 뒤로하고 문을 닫았다. 지금부터 시시한 여행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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