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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사 May 26. 2022

'설마'라는 귀찮음을 뛰어넘을 수 있는 용기

자존심을 굽히고 '설마'라는 귀찮음을 뛰어넘을 수 있는 용기


내가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는 주로 칼퇴를 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항상 퇴근을 같이 가는 동료들이 있었는데 하루는 끝날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내 업무가 조금 남아 있었다. 아무래도 그동안 같이 퇴근을 하다 보니 그 동료가 나를 기다려줬었는데 동료라도 빨리 퇴근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부담이 된다며 빨리 가라고 했었다.


내 일을 다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다시 생각해보니 아무리 좀 친한 사이여도 너무 무례한 언행이 아니었을까? 이 마음이 나를 붙잡고 있었다. 그때부터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동안 친한 사이였는데 이 정도는 괜찮겠지?'와 '아무리 그래도 조금 선 넘은 말 같으니 사과하는 것이 옳은 판단이 아닐까?' 이 두 생각이 지하철에서 집으로 가는 그 상황에서 계속 맴돌았다.


나 같이 마음이 약한 사람은 솔직히 그렇게 심한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내가 내뱉은 말이 계속 마음에 걸린다. 사실 욕을 한 것도 아니고 말 어조가 심하게 날카로웠던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약한 성격은 누군가라면 쉽사리 넘어갈 법한 일에 괜히 계속 마음을 쓴다. 나 개인적으로는 초식 동물 같아서 참 싫어하는 성격이지만 타고난 성격이라는 것은 쉽게 바꿀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오랜 고민 끝에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카톡을 켜서 그때의 일을 사과하는 선택이었다. '에이~ 그 정도는 괜찮겠지, 우리 사이에'라는 판단을 애써 무시한 결과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오늘, 난 아직 까지도 그 순간을 후회하기보다는 참 옳았던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톡을 보내지 않았으면 찝찝함이 계속 마음에 남아 나를 괴롭혔을 것이다. 내가 나름 고민하며 보냈던 톡이 상대방에게는 고마웠었는지 선의적인 답장이 왔고 찝찝했던 마음이 탁 풀렸다.


사실 사과라는 것이 지금 당장은 머리를 굽히고 들어가는 것 같아서 마음이 상할 수도 있겠지만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자신을 높이는 행위다. 이 사회는 암묵적으로 어느 정도 계급이 낮아져 있다. 일부 소수의 분들이 부정하시겠지만 다수라는 세상의 눈을 빌려보자면 분명히 있다. 그런 사회에서 자신보다 돈, 명예, 권력이 높지 않은 사람에게 계산으로 하는 사과가 아닌 마음으로 사과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대단한 사람이다. 세상엔 자신이 잘 못 한일에 대해서 사과한다는 그 간단한 것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이 태반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약간의 찝찝함이라도 있다면 그건 자존심이 아니라 자만심이며 오만이다. 괜히 찝찝함과 함께 살아가기보다는 조금이라도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 생활이 좀 더 살만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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