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프레시
# 0411
겨울 내내 얼어있던 머리가 이제서야 조금씩 돌아가기 시작했는지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졌다.
그동안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고 골치아픈 일들도 있었지만 아무튼 현실적인 문제들과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할지.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내 삶이야 내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니.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화창한 화요일. 집 한구석에 자리만 차지하던 자전거를 타볼까 밖으로 가지고 나갔더니 그동안 바람이 빠져있었다. 30분 남짓 에어펌프를 찾아 집안을 헤매다 결국 먼지 쌓인 박스 속에서 펌프를 찾을 수 있었다. 바람을 넣는데 바퀴가 부풀어오르지 않는다. 뭐가 문제인지 몰라 결국 집 근처 자전거 가게를 찾아보았다. 아무튼 해결책은 간단했다. 타이어에 바람을 넣을 때 조여진 나사를 끝까지 풀어줘야 바람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친절한 주인아저씨가 펌프를 건네주어 그 자리에서 바람을 채워넣고 길을 나섰다.
정말 오랜만에 여유로운 시간을 가졌다. 카페 야외에 캠핑 의자에 앉아 볕을 쬐며 두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좋은 사람과 좋은 시간. 이야기를 하다보니 지난 몇달 간 내가 별 생각 없이 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많은 생각들이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 내가 하고 있는 것들. 어떻게 하고 있는지. 왜 하고 있는지. 어떻게 해나갈 것인지. 주어진 갈림길 앞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그 말이. 지금 당장 고민할 필요가 없으면 굳이 고민하지 말라는 그 말이. 내 머리를 툭툭 털어주었고. 잡념들은 천천히 가라앉았다. 선택과 집중. 무엇을 어떻게 이끌어나갈 것인가.
생각해보니 참 벌여놓은 것들이 많았다. 별 생각 없이 저지른 일들이기에 딱히 어떤 결과를 바란 일들도 아니었고. 굳이 어떠한 결과를 만들어보자면. 효율적이지도 않았다. 나는 그저 조급해서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어떠한 방향성 없이. 뚜렷한 목적없이 뭐라도 해야할 것 같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언제부터 였을까. 2015년 4월 퇴사를 결심한 이후 나는 뚜렷한 방향성을 가지고 살아왔다. 단기적인 목표와 장기적인 목표를 차례로 세워놓고 그 이정표를 따라 꾸준히 걸어왔다. 그런데 지금은 늪에 빠진 것처럼. 아니 방향을 잃어버린 것처럼 지난 몇달을 보냈다. 목표로한 일정은 꾸준히 지켜왔지만 하루. 일주일 씩 그 사이 시간들이 낭비되고 있었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아깝지만. 지금이라도 다시 방향을 되찾았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오늘 하루. 이 리프레시가 없었다면 아마도 5월은 되서야 초조한 상태로 다급하게 방향을 찾으려 했을 것이다. 리프레시. 리마인드. 일에 둘러쌓여서 떠밀려 나아가던 와중에 정신을 차렸다. 내 발로. 내 의지로. 내가 세운 목표를 향해서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중요하지 않은 것들. 효율적이지 않은 것들은 잠깐 내려놓고. 가장 중요한. 핵심만을 다시 부여잡고. 다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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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터링에서 이어진 폰트 디자인.
폰트 디자인은 계속 진행하고 있다. 이전에 비하면 시간적 여유가 있기에 조급하게 속도를 내지는 않지만. 사실 조금 나태해졌다. 이전 같았으면 눈에 불을 켜고 작업에 열중했을텐데. 지금은 그저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내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레터링이었다. 한글레터링 수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레터링을 가르쳐주는 과정에서 이론적인 부분은 정리가 되어가는데. 직접 작업을 못하고 있다. 지난 3년. 2년. 1년 전과 비교하면 그보다 좋아보이는 글자를 그릴 수 있는데. 다양한 글자의 형태. 표현에 대한 아이디어는 있는데. 손을 놓고 있었다. 내 강점은 폰트디자인이 아니라 레터링이었다. 폰트 디자인을 위한 수단만이 아니었다. 다시 연필을 들고 글자를 그려야한다. 더 정교하게 더 다양한 형태의 글자를 그려두어야 한다. 내가 추구하는 길이 한글 글자 표현의 다양화라면. 폰트 디자인보다도 레터링이 우선시 되어야하고 폰트는 그 결과물로서 파생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폰트를 놓을 수는 없는 것이고. 폰트디자인도. 레터링도. 같이 가져가야 한다.
지난 1-2년의 시간은 정말 치열하게 살았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그나마 여유롭다. 월세 걱정도 덜었고. 맛있는 고기도 자주 먹는다. 내가 자처한 독립디자이너의 속성은 음악으로 치자면 인디밴드와 같은 것이다. 그 행태가 똑같을 수는 없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디자인을 하는 것. 주류가 아닌. 대중적 취향보다는 나만의 오리지날을 가져갈 수 있는 것. 메이저가 아닌 마이너. 혹은 B급 문화. 서브컬쳐와 같이. 나만의 고유함을 보다 높이 끌어올리고 싶은 마음. 그와 같은 생각들이 잊혀져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잘한다 잘한다 해주니까 정말 잘하는 줄 알고 있었다. 멍청하게도. 레터링 수업을 진행하면서도 느끼는 바지만. 이정도는 누구나 일정 시간을 노력하면 해낼 수 있다. 애초에 그래픽 디자인에서 폰트 디자인으로 노선을 변경한 것도 쉽게 따라할 수 없는 작업을 원했기 때문이다. 누구나가 흉내낼 수 있다면. 그것이 카피캣이든. 뭐든. 고유하지 않다. 내 성향은 아티스트에 가깝다. 디자이너의 마인드를 가졌다면 어땠을까. 횡설수설하지만 아무튼 다시 칼을 쥐고 날을 갈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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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프레시. 리마인드.
그런 의미에서 리뉴얼한 제스타입 심볼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