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대학에서 학생 조교로 일하기
2018년 4월의 글
오늘은 일요일. 일주일 내내 감기로 골골대다 몸이 좀 나아진 것 같아 악기 박물관에 나왔다. 악기 박물관은 오래된 건물에 있어 실내가 춥다. 밖이 따뜻해도 실내 온도는 몇 도 낮다. 그래서 항상 옷을 따뜻하게 입고 온다. 겨울 재킷에 머플러를 두 개나 가지고 왔는데도 콧물이 나고 재채기를 한다. 따뜻한 차를 계속 마시는데도 춥고 눈이 뻐근하다. 화장실 가는 길 창문에 비치는 햇살이 보인다. 오늘 아침에는 구름이 껴 있었는데 이제 해나 나네!
함께 일하는 친구에게 잠시 햇볕 좀 쐬고 오겠다 했다. 건물 앞 벤치에 앉아 햇볕을 쐬었다. 평소라면 얼굴 타는 거 걱정하며 햇볕을 잘 쐬지 않는데 오늘은 상관없다. 따스한 햇볕이 고맙다. 콧물도 안 나고 재채기도 안 나온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매일 보는 장소, 매일 다니는 곳인데 이렇게 앉아서 보니 달라 보인다.
새로운 친구 헬게 Helge
오늘 아침 악기 박물관에 새로운 친구가 왔다. 일요일마다 여는 악기 박물관에는 음악학을 전공하는 세 명의 학생이 조교로 일한다. 지금까지는 나와 리자 Lisa, 레오니 Leonie 가 함께 일했다. 오늘부터 한 달에 한 번씩 리자 대신 헬게 Helge 가 일하러 온다. 음악학·영문학 복수전공하는 리자는 영문학과에서 새로운 조교 일을 시작했다. 영문학과와 음악학과 조교 시간을 나누다 보니 악기 박물관에는 한 달에 3번씩 오기로 했단다. 레오니가 헬게에게 음악학 건물 로비의 불을 켜는 것부터 악기 박물관에서 하는 일까지 꼼꼼하게 설명을 해준다.
2년 전, 악기 박물관 학생 조교의 시작
긴장을 하며 레오니의 설명을 듣는 헬게를 보고 있으니 나의 악기 박물관 첫날이 떠오른다. 우연한 기회에 시작하게 된 학생 조교 일. 2학년 때 악기박물관 악기들에 대해 공부하는 수업이 있었다. 박물관 악기들 중 하나를 골라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소논문을 제출하는 전공수업. 학기가 끝날 즈음 교수님께서 학생들에게 악기 박물관에서 일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셨다. 원래 2월부터 일하기로 한 학생이 사정이 생겨 4월부터 일하게 되었다고 한다. 2개월 일 할 학생을 다급하게 구하고 있으셨던 모양이었다. 잠시 망설이다 용기를 내어 손들었다. 교수님은 내 이름을 받아 적으셨고 얼마 후에 행정실에서 이메일이 왔다. 필요한 서류를 제출하고 계약서를 작성하라고.
나와 계약서를 작성했던 교수님은 악기 박물관 강의를 하신 교수님이 아니라, 음악학과에서 가장 근엄하고 무서워 보이는 교수님이었다. 평소에도 약간 거리감이 느껴지는 분이었다. 교수실에 들어가며 인사를 하고 책상에 앉았다.
"교수실이 참 넓네요."
"넓죠? 가끔은 너무 넓다고 생각해요."
교수님께서는 계약서 보여주시고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신 다음 중요한 부분을 읽어주셨다. 당시 나는 법률용어가 난무(?)하는 계약서 속 독일어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악기 박물관에서 들었던 말은 밖에서 하지 말고, 악기 가져가지 말라는 것이지요?"
빙그레 웃으며 그렇다고 하신다. 교수님의 미소를 처음 보았다.
학생 조교로 일하는 첫날, 설레는 마음으로 악기 박물관으로 향했다. 수업 들으러 일주일에 몇 번은 오는 곳인데 일요일에 오니 느낌이 달랐다. 1년 선배인 엘리자베스 Elizabeth 가 자전거를 타고 오며 인사한다. 엘리자베스와는 수업을 두 번 같이 들어서 얼굴을 알고 있는 사이였다. 음악학과 건물 문을 열고 로비 불을 켠 후 2층 악기박물관으로 올라갔다. 조금 있으니 2년 선배인 펠릭스 Felix 가 도착했다. 펠릭스는 내가 1학년 때 들었던 Tutorium의 Tutor여서 잘 알고 있다. 반갑게 인사를 했다.
일을 시작하고 얼마지나 알게 된 사실. 엘리자베스 아버지께서 괴팅엔의 이웃 도시 카셀 Kassel 음대에서 피아노를 가르치셨단다. 한국인 제자가 많아서 한국에서 마스터 클래스도 하셨다고.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여전히 한식을 좋아하시고 특히 김치를 좋아하신다고 했다. 한국에 다녀오실때마다 항상 김치를 사 오셨다고 ;-)
엘리자베스는 나랑 1년 동안 수업을 두 번이나 같이 들으며 내가 한국인인 줄 알았을 텐데, 이 반가운 이야기를 어떻게 지금까지 안 하고 참았을까? 내가 엘리자베스였다면 첫날 바로 한국인 학생에게 다가가 "우리 아빠가 카셀 음대에서 피아노를 가르치셨는데 한국인 제자들이 많았대. 한국에도 몇 번 갔다 오셨고. 그래서 김치도 엄청 좋아하셔~" 반갑게 인사했을 텐데. 이제 와서 이야기를 하는 것 보니 참 독일스럽다. 독일사람들은 천천히 다가온다. 바로 다가오지 않고 일단 관찰(?)을 한다. 아마 엘리자베스도 한국인인 내가 내심 반가웠지만 일단 기다렸나 보다. 아버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때까지.
그렇게 악기 박물관 학생 조교 일이 시작되었다. 차이콥스키를 좋아하는 공통점을 가진 나와 엘리자베스는 종종 함께 음악을 들었다. 펠릭스는 학교 수업과 시험에 대한 정보를 많이 줬다. 펠릭스도 음악학과 사회학을 전공해서 내가 그때 듣고 있었던 수업을 이미 다 끝낸 상황. 또 펠릭스는 악기박물관의 악기들에 대해 잘 알고 있어 악기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 줄 때마다 나는 열심히 메모했다. 그렇게 두 달동안 일했고 그해 10월 악기박물관에 자리가 생겨서 정식으로 일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