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무계획 여행 下
여행의 마지막 날.
엄마와 내가 도착한 역은 <텐가챠야>라는 이름의
역이었다. 유난스러울 정도로 맑은 날이었던 것이 기억난다.
여행에 적합한 인간인가 아닌가는 아직까지도 알 수가 없다. 사람이 없는 역에 도착하자 숨통이 트여 행복했다. 인적의 정도에 따라 여행을 대하는 태도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걸까.
역사가 주는 느낌이 좋았다. 왠지 마음이 갔다. 깔끔하고 고요했다. 동네 주민들이 돌아다니던, 그래서 여행객 둘이 이질적으로 느껴지던 장소였다.
우리는 당초 여행을 계획하며 내내 바랐다.
이왕이면 집이 모여있고 여행객보다 동네 주민이 많은 곳에 갔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바람과 달리
유명 지역으로 가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박힌 탓에
오사카의 메인 스팟을 택했다.
소도시라든가 비교적 유명세가 덜한 곳으로 떠나는 여행도 유행인 듯 하지만, 아직 그러한 레벨에 못 미친다고 여기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텐가챠야 역에서의 산책은 우릴 들뜨게 만들었다.
(물론 설렘과 별개로, 더위에 지쳐 물 머금은 수건처럼 다리를 질질 끌고 다녀야 했다.)
바랜 간판. 한국으로 오는 여행객들이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골목과 주택가를 찍어 가는 것처럼, 나 역시도 여기저기를 담았다.
어린 시절 보았던 만화를 떠올리지 않기가 힘들었다.
당장이라도 주인공이 나와 부모님의 일을 거들 것만
같았다.
여름이라고 소리치는 듯한 색의 조합에 감탄하며
슬쩍 그늘을 차지했다.
태어나 처음 보는 인형인지 가방인지 모호한 것을
목격했다.
이제서야 사진을 들여다보니 잡화점 같은데, 가방(또는 인형)을 좀 더 구경할 걸 그랬다.
물론 이 때로 다시 돌아가도 어영부영 구매해버릴까 봐 지나치겠지만.
뻔하다 하면 뻔한 풍경을 좋아한다. 엄마와 나는 조용한 집들을 보면서 오길 잘했다는 말을 했다.
한국에서도 집과 집 사이를 누비고 다니며 계단에 걸터앉은 사람들과 헉헉거리는 강아지, 일 년 새 무성히 자란 화분 같은 걸 구경하기 좋아한다면 추천한다.
귀여운 일러스트 로고가 그려진 코인 세탁소.
지금 와 보니 간판이 아주 크다.
코인 세탁소 주위를 지나면 나는 다른 가정에서의
세탁 냄새가 좋다.
사실 목적지까지 가는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주택가를 빠져나와 땡볕 아래를 꽤나 한참 걸어야 했는데(나중에서야 안 사실이지만 좀 더 돌아서 갔다) 참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편의점 아무 곳을 붙잡고 들어갔다.
한숨을 돌리고 목구멍까지 차가워질 만한 음료 하나를
골랐다. 카페에 갈 예정이었지만 이후 마실 음료 한잔 때문에 당장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을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거의 다 도착했다고 기운을 북돋는 목소리,
누가 보면 높은 산을 등정하는 인물 같다.
그렇게 도착한 카페는 주택들 사이에 숨듯이 존재했다. 기억으로는 입구가 조금 낮았던 것 같다. 관념 속 숲 안에 있을 법한 카페의 외관은 상당히 아기자기했고 자그마했다. 들어가니 손님은 우리뿐이었고 테이블의 가짓수도 적었다.
앤틱 한 인테리어와 맞물리는 시원한 실내 온도에
그제야 시력을 회복한 기분이었다.
마루 밑 아리에티라는 영화 속 인테리어처럼 소담하고
정겨웠다. 물건들의 요소요소에 매력이 또 정이 느껴졌다.
맞물리려고 하니 모든 게 맞물렸던 순간.
정말이지 예쁜 녹음이 창으로 들이쳤다.
그나저나 누가 그린 일러스트였을까.
친화력이 좋은 여행객이었다면 물어봤을 수도 있겠으나 나는 모든 걸 상상으로 마치고 메뉴를 넘겼다.
노부부로 보이는 사장님 두 분이 매우 친절히 응대를 해 주셨다.
메뉴판의 오른쪽 페이지에 그려진 시원한 디저트를
골랐다.
이실직고하자면 무슨 메뉴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골랐다. 디저트의 이름을 이제와 찬찬히 읽어 보니
‘카시스 샤베트 사이다’라는 메뉴인 듯한데, 구글이 설명하길 블랙커런트라는 열매라고 한다. 이것을 프랑스어로 카시스라 부른단다.
엄마가 주문한 메뉴는 브런치 세트였나 보다.
파스타와 빵과 샐러드, 자연광을 받아 더욱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공간을 즐기고 상쾌한 기분으로 인사를 나눴다. 겨우 식사 한 번 했을 뿐인데 가게에서의 마지막이, 여행의 마지막이 너무나 만족스러웠고 은근히 서글퍼 웃겼다.
나와 엄마는 가게를 나오면서 이야기 나눴다.
우리가 이 동네에 또 이 가게에 언젠가 다시 올 일이
있을까?라는 주제였다. 나는 돈도 시간도 가진 것이 별로 없는 가성비에 혈안인 인간이라, 다음 여행의 목적지는 두 번이나 온 오사카가 아닐 확률이 높겠지.
가게를 빠져나가자 따갑게 내리쬐는 햇살에 무언가
느낄 겨를도 없이 다시 무거운 가방을 힘주어 메고 걸었다.
지하철 선로는 어디에서 봐도 설렌다.
미디어를 너무 봤다.
외국에서의 삶을 간접의 간접의 간접으로 느꼈던 날.
여행의 경험이 남들보다 적지만, 어딘가를 갈 때면
오래오래 머물고 싶어진다.
비행기를 타기 전 시간이 남았다. 더위와 허기를 달랠
곳이 필요했다. 쇼핑몰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하고, 마트와 이런저런 가게가 입점한 건물로 향했다.
빵을 매우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용케도 참았다 싶다.
퀄리티가 상당한 빵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컸다. 마트 구경은 언제나 재밌다.
마지막은 내가 가장 잘 아는 맛으로 마무리하고 싶었다. KFC에 들러 파이와 텐더를 시켜서 먹었다.
사실 여행에서 먹은 것 중 가장 맛있었다.
미뢰에 문제라도 있는 걸까?
전철을 타기 전 엄마가 대뜸 구매한 딸기 아이스 찹쌀떡이다. 예상 가능한 맛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귀여우니 됐다. 어떤 건 귀여운 걸로 쓸모를 다한다.
엄마는 전철에 타 가장 진지한 잠을 잤다.
오사카는 지금이나 앞으로나 여기에 있을 텐데, 나는 황당하게도 잘 있으라 ‘안녕’한다. 드디어 집에 간다는 생각에 고양되었다.
여행에서 두 손 무겁게 가는 스타일이 아니라,
공항에서 먹을 것 몇 개 정도를 사 갔다.
편의점 봉투 하나를 겨우 채웠는데 나중에서야 생각
했지만, 약이라도 하나 살 걸.
이렇게 덥고 끔찍한 그래도 즐거웠던 여행이
끝이 났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눈이 절로 감긴다. 여행은 참 생각할 것도 많고 품도 많이 드는 피로한 것이지만 분명히 뭐가 남긴 남는 모양이다.
마침 여름이 다가오기에, 작년 여름을 꺼내어 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