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에피소드
내 것이 아닌 마음이 불청객처럼 머릿속을 어지른다.
때때로 이렇게 정신이 든다. 방금까지의 난
첫사랑을 만나기에 앞서 수줍은 소녀였는데.
바닥의 재질이며 공기의 흐름까지. 여긴 기억 속이다.
'그 애와 나 사이 흐르는 가냘픈 멜로디는
수많은 연인들의 귀를 타고 오르던
천사의 숨소리와도 같았다. 나는 그걸 알았다.
밟아선 어린 잎도 금이 간 연하늘의 천장도 모두 같은
얘길했다. 그 애의 속눈썹을 가르는 미지근한 바람,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투명했다
자꾸만 투명하게 끌어당겼다...’
이상하지, 애틋한 감정이 드는데 실은 붕 뜬 기분이다.
연기라도 하듯 가식을 쓴 느낌이다.
세상이, 불어오는 바람이 불분명하다 느낀다.
어디서 온 바람인지 생경함 뿐이다.
현실과 어긋난 향이 뱃속으로 내려온다.
나는 지금 열여섯의 어린 소녀다. 그 애의 뒷모습을
좇는 아이다. 그러나 되뇌일수록 속이 꼬이는 것 같았다.
생각을 하자. 응, 생각을 했다.
사람들은 시간에 깊숙이 손 집어 넣어 아래를 더듬는다,
그걸 회상이라고들 한다. 꺼내려는 건 추억이다.
아래로 또 아래로 내려와 허상이라도 줍고 싶어 하는
아무개의 모습이 지나갔다. 내게 기억을 부탁한 이의
실루엣이다.
나는 지금 열여섯 소녀였던가, 그 애의 뒷모습을 쫓았던가. 그 애라 하면 그 애는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난 그저 누군가의 과거를 재연하는
연기자. 무대의 주인이기도 혹은 회상의 대리인이 되기도 한다.
안테나를 통해 전파처럼 날아든 마음들이 있다.
발신자는 구체적 정보없는 세계의 누군가.
서비스를 제공한다, 머나먼 여기서 저곳까지.
매번 그래, 그게 맞아. 그런데 잊어버려. 그러다 떠올려.
오늘은 누구의 부탁이었더라. 일종의 의뢰를 하나
받았던 것이다.
나는 열여섯이기도 했다가, 곱절은 더 나이 먹기도 했다가 여자이기도 남자이기도 한다. 훈훈한 공기 속에 때로는 말 못하는 동물이 될 때도 있다.
누군가가 미칠 듯 그리워 떠올리는 과거는 예고 없이
들이닥친다. 그럼 우린 기억을 위한 준비로 바빠진다.
- ‘우리?’
그 때마다 나는 태어나고 다시 죽는다.
적당한 빛과 향, 가짜라지만 숨까지 배우와 같은 운명이다.
회상에 잠깐 반짝이고 마는 인물이란 사실을 늘
일몰하기 전 깨닫는다. 몰입과 망각을 반복한다.
다시 그 애의 얼굴을 돌아본다. 이번엔 똑바로 바라본다.
앳된 얼굴에, 태양을 받아 밝게 빛나는 눈과 피부.
군데 군데는 뭉개지고, 그러나 맑게 갠 웃음은 내가 왜
여기로 왔는지 알게 만든다. 모르는 얼굴이지만
참 예쁜 미소다. 무명의 발신자는 이게 그토록
그리웠던 건가.
내 몸에 붙은 팔과 다리가 신이 난 듯 움직인다.
가늠할 수 없이 뜨거웠던 날.
아프기도 했던 그런 기억인 모양이다.
평소보다 더 활짝 웃어보았다. 평소보다 짜릿한
햇볕을 내려 보았다. 모든 게 유난히 환했다.
이럴 수도 있구나. 기억이 무너지고 있다.
어깨와 팔도 부서지고 있는데
모르겠다. 그냥 그 애를 따라 맑게 웃었다.
회상 중인 이에게 행복으로 닿기를 바라는
이타적인 마음이 찰나였다. 나로 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다.
*
그건 참 맑게 갠 웃음이었다.
무엇과도 비할 수 없어, 꺼내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5분 쯤 되는 시간이 영원 안에 갇혀 있다.
눈을 감는다. 전화를 걸 듯 버튼을 눌러 간다.
이건 일종의 신호다.
왜인지 누군가에게 내 마음이 가닿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