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은 추위를 동반한다

소설 |

by 일영



그 웃음은 참 세련돼 보였다. 웃음에 세련되고 말고 할 것은 없겠지만 보자마자 떠오른 감상은 그랬다- 나는 건방지게도 그렇게 생각했다.

학교로 통하던 폭이 넓은 내리막길 그 길을 지나며 늘상 자신의 집 대문 앞에 앉아 있는 할머니를 보았다. 떠도는 어른들의 이야기로는 오래 전에 남편을 여의고 딸과 단 둘이 살았다는 모양이다.

쓸어넘긴 머리와 한 손에 들린 부채, 숨 헐떡이는 하얀 강아지를 옆에 낀 할머니는 어딘가 묘했다. 자꾸만 알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초등학생이었을 적엔 그녀에게서 일순간 떠올린 세련되었다는 말의 정확한 뜻을 찾으려 사전을 뒤적이기도 했다. 2번에 해당하는 ‘모습 따위가 말쑥하고 품위가 있다’가 과연 정답인지는 모르겠다. 아무리 의미를 뜯어보아도 난 잘 모르겠는 것이었다. 그 이상의 표현으로 대체하기 까다로운 다소 그런 분위기가 떠돌고 있었다.

그녀는 더운 계절엔 꼭 현관 앞에 앉아 바람을 쐬었고 날이 추워지면 아주 가끔 눈을 쓸기 위해서만 나왔다. 아무래도 나는 그녀를 은근히 기다리며 자신도 모르게 신경을 썼던 것 같은데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자연스레 갈색이 된 눈동자나 말을 삼킨 듯 일자로 다물어진 입이 어떤 뜻을 가진 것인지 궁금했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에는 그녀의 자녀를 보았다. 키가 훌쩍 큰 여자였는데 지쳐 보였다. 차를 끌고 왔으며 어린 나의 눈에는 경제적인 안정을 오래 전에 얻은 듯한 인상이었다. 그래서인지 우리 동네와는 먼 사람같았다. 희미하다고 생각했다. 깜박거리는 빛으로 겨우 존재감을 유지하는 것만 같았다. 슬퍼 보이기도 해서 그 연유를 묻고 싶어졌다. 정말이지 버르장머리 없게도 말이다. 중학교 졸업식 날, 평소보다 반듯한 교복 차림에 코트를 껴 입고는 가족과 그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그 날 나는 할머니의 딸이 액자 하나를 품에 안은 모습을 보았다. 울지 않았지만 울고 있었다. 액자는 회색이었는데 젊은 남자가 얼핏 보였다. 소문 속 할머니의 요절한 남편인 것일까. 반쪽짜리 얼굴에서 기시감이 느껴졌다. 찰나였으나 속이 울렁였다. 나는 진학할 고등학교에 대한 걱정이나 친구 관계에서 오는 고민 따위가 순간 유치하게 느껴졌다.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닌 생각 같았고 그래서 몸이 붕 뜬 기분이었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는 통학하는 길이 달라져 하는 수 없이 반대편으로 버스를 타고 다녔다. 머리 한 켠으로는 계속 현관 앞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그 길을 지나칠 명분도 찾아갈 이유도 없었다. 그저 야간자율학습이 끝나면 지그시 눈 감고 떨치려 애쓸 따름이었다. 쏜살같이 흐르는 시간선을 걸으며 때때로 나이가 많은 그 여자와 그녀의 딸이 죽어버렸으면 어쩌지 생각했다. 모두 액자 속 그 남자처럼 표정을 멈춘 채 갇혀버렸을까봐 나는 쓸모도 없이 불안해 했다. 가끔 잠이 들면 무의식 가장 깊은 곳에서 그 길을 보았다. 스무살 남짓으로 어려 보이는 여자가 제 집 앞을 서성였다. 여자의 등에는 포대기에 싸인 아이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여자의 머리는 눈동자처럼 갈색이었고 그녀의 동작에선 불안함이 엿보였다. 그럼에도 분위기는 세련되었다. 그녀는 아주 아름다운 시 하나를 아이의 귀에도 닿지 않을만큼 작은 소리로 읊었다. 눈을 천천히 굴리더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가 어찌나 공허한지 나는 뒷걸음질을 칠 뻔했다. 그녀는 분명히 나를 보고 있었다. 나를 완전하게 눈치챈 모습이었다. 종종 같은 꿈을 꾸었고 그 탓에 내리막길로 나를 끌고갈 용기가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왜인지 겁이 났다. 죄스러웠고 두려웠다.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어느새 졸업을 한 나는 대학생이 되었고 어영부영 흐른 시간 끝에 직업을 가졌다. 그러나 그것이 내 인생의 목표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고백해야 했고 사과를 해야 했다. 내 진짜 인생은 지난 날 애매하게 끝맺어지고 말아, 현재까지 이어진 것일 터였다.

눈이 내리고 있다. 오늘이라면 눈을 쓸러 나왔을지 모른다. 곧바로 차를 몰았다. 정신없이 도착한 내리막길 위에 차를 비스듬히 주차했다. 갈색의 머리를 하나로 예쁘게 땋은 어린 여자가 제 집 앞을 쓸고 있었다. 눈을 한 번 깜박이니 백발의 여자가 빗자루를 쥐고 있었다. 주름진 손에는 반지 하나 없다. 입에서 나오는 하얀 김이 머리 위로 퍼져 그녀가 살아 있음을 알게 된다. 구두가 미끌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를 불렀다. 동그란 눈이 나를 본다. 그 때 하지 못한 말을 했다. 지금의 몸으로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무수한 기억과 추억, 그리고 전달하지 못한 마음이 있다. 갈색의 눈동자, 그건 남편을 여읜 스무살의 여자가 속에 있음을 명백히 나타낸다. 기다림으로 아프게 해 미안하다는 고리타분한 말을 했던 것 같다. 이런 모습으로 찾아와 미안하다고도 했다. 그녀가 나의 말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었는지는 모른다. 단지 눈물을 흘렸고 무슨 말이라도 할 생각이었는지 굳게 닫혀 있던 입을 뻐끔댔다. 때마침 나온 그녀의 딸은 제 어머니의 그런 모습이 당혹스러운지 서둘러 집 안으로 들였고, 이렇게 만든 수상한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려 날카롭게 쏘아보았으나 나는 잠깐의 누그러진 기색을 엿보았다. 두 사람이 사라진 새하얀 풍경 안에서 난 다시 눈 감았다.

떠올린다. 내리막길은 이제 재개발 지역이 되어 철거가 될 예정이고 그 집에 살던 사람들은 곧 나올 것이다. 그러나 나오기도 전에 나이가 많았던 여자는 조용히 숨 거둘 것이다. 딸은 다시 도시로 가 제 삶을 마저 개척한다. 그리고 나는 내가 선 이 곳에서 누군가를 찾는다. 그러다 다리가 아파오고 그늘이 삐죽 드리워진 곳에 앉아, 오고 가는 사람들을 볼 테다. 미소와 눈빛, 안쪽에서 숨쉬는 여전한 영혼을 알아볼 거라 생각하면서 한참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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