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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닉 Apr 17. 2021

동료와의 신뢰가 중요한 이유

사회적 자본 (social capital)

우리는 동료를 얼마나 신뢰하는가? 신뢰는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인 존재인 것인가? 나는 서로 불신하고 또 그러한 관계에서 고통받는 동료들을 보며 고민을 정말 많이 했다. 뭔가 잘못된 것이라는 느낌은 드는데, 그것을 말로 정확히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답답한 나머지 관련된 서적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동료 간의 신뢰가 없는 조직은 일의 진행이 더디다, 반대로 신뢰가 깊은 조직에서는 일처리가 빠르게 진행된다. 한때 사회학계를 휩쓸었던 용어이자 '나 홀로 볼링 (사회적 커뮤니티의 붕괴와 소생)'이 출간된 2000년부터 대중적 용어가 된 '사회적 자본'은 우리의 궁금증을 풀어줄 것이다.




사회적 자본

'물질적 자본'은 돈이나 물건 등의 자본을 가리키고, '인적 자본'은 전문 기술 등의 개인 역량이다. 이 개인들의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다. 더 정확히는 '개인들 사이의 연계, 호혜성과 신뢰의 규범'이다. 자본이 많은 회사가 경쟁에서 유리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사회적 자본'또한 그중 하나다. 아무리 돈이 많고, 인재가 많은 회사라도, 동료 간의 신뢰가 엉망이고, 그러한 가치를 터부시 하는 구성원들이 회사의 분위기를 주도한다면, 그 회사는 가난하다.


신뢰는 의심의 비용을 줄여준다. 예를 들어 작은 섬마을 주민들이 서로를 불신한다면, 자전거 자물쇠를 사야 하는 비용이 든다. 만약 이웃 간의 신뢰가 있다면 자전거 자물쇠를 구매하는 비용과 감시하는 비용이 사라진다. 불신할수록 서로의 사이에는 많은 장치들이 놓이게 되는데 이것은 모두 시간과 돈을 들게 한다. 조직의 신뢰도를 높여서 이런 것들을 걷어 낸다면 결정과 피드백 속도가 빨라지게 된다. 원활하게 흐르는 혈액처럼 조직이라는 몸체에 활력을 불어넣게 된다.



높은 신뢰는 배당이며, 낮은 신뢰는 세금이다

스티븐 M.R 코비가  '신뢰의 힘 (조엘 피터슨, 데이비드 캐플런 저, 박영준 역)'에서 추천사로 적은 "높은 신뢰는 배당이며, 낮은 신뢰는 세금이다."라는 말이 정말 인상 깊었다.


신뢰가 낮은 사이에서는 소통을 할 때마다 세금을 지불하듯이 필요 이상의 비용이 든다. 상대방의 모든 동기를 의심하게 되고 '감정', '시간'등이 소모되는 것이다. 상대방이 정말 좋은 의견을 내도, 검증을 하는데 시간이 필요 이상으로 걸리거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검증의 과정은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이미 불신을 하고 감정적으로 돌아섰다면, 합리적인 사고를 하긴 더욱 어렵다. 자신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나는 아주 합리적인 이유로 의견을 반대했어!" 그러나 상대방의 의견 중 잘못된 부분을 확대하고 결국 잘못된 의견이라는 방향으로 사후 합리화했을 경향이 있다. 자신도 느끼지 못한 사이에 말이다. (이러한 연구 결과들이 궁금하다면 '바른 마음, 조너선 하이튼 저'책을 추천한다)


신뢰가 있는 사이라면 원활한 의견 공유를 통해 신뢰가 더욱 두터워지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다음 소통에 다시 도움을 준다. 신뢰는 신뢰를 낳고 불신은 불신을 낳는다.



신뢰의 선순환과 불신의 악순환

신뢰와 불신에는 자기실현적 예언이 있다. 동료에게 신뢰를 주면 동료는 기대에 부응하고자 노력한다. 그래서 기대에 합당한 결과를 내놓으며 그걸 본 나는 더 큰 신뢰가 쌓인다. 반대로 동료에게 보내는 불신은 결국 우려하던 상황이 만들어지도록 유도한다. 그러므로 그 동료를 불신한 결정이 옳았음을 더욱 확신하게 된다. 이런 순환은 한쪽으로 쉼 없이 굴러간다. 불신의 악순환이 시작되면 한쪽에서 다시 신뢰를 주며 악순환을 멈추고 선순환으로 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인간은 자신에 대한 평가를 민감하게 느끼도록 진화했다. 과거 집단에서의 소외와 이탈은 식량을 구하지 못하거나 맹수에 노출되는 등 생존에 아주 치명적이었기 때문이다. 누가 나에게 신뢰를 보내는지 아닌지를 감각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을 불신하는 사람을 신뢰하기란 어렵다. 결국에는 자신을 불신하는 사람을 불신하게 된다.



불신의 전파

내가 가장 위험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A라는 동료를 깊게 알지 못하지만, B를 통해서 A의 욕을 듣는다면 (그것도 공감을 강요받는다면) A를 제대로 겪어 보지도 않고 불신이 생겨버린다. 한두 명의 문제가 아니다. 내 경험상의 불신 전파자들은 대략 6할은 불신하는 것 같았다. 내가 회사에서 그 많은 사람들을 불신한다면 원활한 업무가 진행될 수 있을까? 신뢰하는 사람끼리의 국지적인 업무만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불신의 악순환에 의해 상대방도 나를 불신한다면? 삽시간에 불신의 바이러스는 회사에 전체에 퍼져 업무 속도를 늦출 것이다.


특히 전파자가 높은 직위일 경우는 문제가 더 크다. 상사의 의견을 거부하기는 어렵다. 내가 그 6할이 되지 않기 위해선 동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더 조심해야 한다. 다수를 품을 줄 알아야 하며, 아무리 피드백을 해도 안 되는 구성원은 책임지고 내보내야 한다. 또한 두 조직의 리더 간에 불신은 마치 38선처럼 아래 모든 사람의 사회적 연결망을 단절시킨다.


희소식은 불신이 전파되듯 신뢰도 전파된다는 것이다. 앞장서서 먼저 신뢰를 보내는 리더는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고, 권위로서의 존중이 아닌 진정한 명망을 얻는다. 조직에 신뢰라는 윤활유를 발라 소통의 고속도로를 뚫어 놓는다. 좋은 리더는 좋은 문화를 만든다.



신뢰와 즐거움

2020년 회사 문화 목표가 "매일 출근이 기다려지는 신바람 나는 조직 문화를 만들자"와 같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회사는 최우선적으로 이익을 창출하는 곳인데 어떻게 신나는 것을 우위로 둘 수 있지? 치열하게 진행되는 일과 신나는 것은 상반되는 것이 아닌가? 그 과정 속에서 즐거움은 부차적으로 얻어지면 좋은 정도가 아닌가?"라는 의심을 했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정말 좋은 목표였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신나는 회사와 일 잘하는 회사는 상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적 자본'이 탄탄한 회사는 구성원이 신이 날 수밖에 없다. 생각해보라 나를 신뢰하는 동료들이 있는 회사에 나간다는 것은 정말 즐겁다. 인간의 심리기제는 집단에서 신뢰를 받을 때 행복 회로를 돌리도록 진화해 왔기 때문이다(그래야 동일한 행동을 계속하게 되고 결국 자신의 생존과 번식에 유익하기 때문). 회사에서 신뢰를 받고 있다는 것은 엄청난 행복이고 "매일 출근이 기다려지는???..." 까지는 어렵겠지만, 정말 다닐 맛나는 회사가 될 수 있다. 불신의 눈초리가 가득한 회사에 출근한다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울 것이다.


다니기 좋은 신나는 회사라고 해서 '편안한 월급 루팡'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내 주위 동료들은 그렇지 않다. 기여하는 것 없이 월급만 받는다고 느끼면 고통스러워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신뢰 속에서 일어나는 행복한 노력이다.


사회적 자본은 '개인적 이익'인 동시에 '공적인 이익'이다.

- 나 홀로 볼링, 로버트D 퍼트넘 저, 정승현 역, 페이퍼로드 2009, 21p


(고통 = 열심히 일하는 것), (행복 = 띵까띵까 노는 것) 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치열하게 일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사회적 자본을 파괴하고 있을 수도 있다.



불신은 나의 고통

동료들을 불신하는 것에 가장 큰 피해자는 자기 자신이다. 내가 불신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 보면, 모든 회의가 고통스럽게 된다. 동료들의 의견 하나하나에 아주 큰 그것도 불쾌한 정신적 자원을 들여야 한다. 결국 상대방도 나를 불신하게 된다. 서로가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를 들고 있어도, 사이의 연결 도로가 끊겨 전달되지 않는다. 하나를 결정하는데도 수차례의 회의가 필요해진다. 결국엔 어떤 결정에 이르더라도 한쪽은 불쾌하게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 불쾌한 감정은 또 다음 회의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친다. 회의는 단거리 달리기가 아닌 장거리 달리기다. 회의에서 상대의 감정에 상처를 입히면서 까지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행동은 그다음 회의를 힘들게 한다. 상대방의 심리적 방어기제를 작동시키기 때문이다.


상사가 부하 직원들을 불신한다면 모든 일을 자신이 도맡아 하게 된다. 부하 직원에게 일을 맡기더라도 감시하느라 신경을 쓰게 된다. 처음에는 자신이 회사에 없어서는 안 될 히어로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결국 과중한 업무를 감당할 수 없게 되고, 회사 업무가 느려지는 병목 지점은 자기 자신이 된다. 그 기분은 아주 고통스러울 것이다. 좋은 리더는 원맨쇼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신뢰를 적절히 분배하여 조직 차원에서 유기적으로 잘 돌아가게 해야 한다.



맹목적 신뢰를 하라는 것인가?

모든 동료를 맹목적으로 신뢰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불신이 아닌 신뢰로 시작하고, 실수를 했다고 쉽게 불신으로 돌아서지 말자는 것이다. 신뢰라는 단어에는 '실수를 포용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인류의 대략 300만 년의 문화적 진화(불, 도구, 음식 조리법 등)의 대부분은 실수들의 누적으로 현재까지 발전해왔다. 실수를 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도전하지 말라는 것이다. 발전도 없을 것이다.


수차례의 신뢰를 줬는데도 문제가 있는 동료가 있다면, 더는 피해받지 않기 위해 불신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을 다른 동료에게 공감을 강요하는 식으로 전파해서는 안된다. 내가 불신하는 동료에게 원하는 가치는 각기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측면에서 보면 충분히 신뢰받을 수 있는 동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만약 다수의 구성원들이 동일한 사람에게 문제를 느낀다면, 그것은 회사 차원에서 책임지고 조치를 취해야 한다.




신뢰하고 가끔 실망하는 것이 영원히 불신하고 가끔 옳은 것보다 낫다 (닐 A 맥스웰 교육자이자 종교지도자)

- 신뢰의 속도, 스티븐 MR 코비 저, 정병창, 김경섭 역, 김영사 2009


'사회적 자본'이라는 용어가 여러분의 인식 속에 들어갔다면, 이 글의 목적은 달성된 것이다. 마법의 안경을 쓴 것처럼, 자신이 속한 집단에 있는 '사회적 자본'들이 보이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신경 쓸 수밖에 없고, '사회적 자본'을 축적하는 방향으로 행동하게 된다.


나는 이 글에서 '사회적 자본' 중에서도 핵심인 '신뢰'를 중점으로 얘기했다. 더 넓은 의미는 다음 글에서 '집단 두뇌가 문화적 진화에 끼친 영향'과 연결하여 조직 차원의 '집단 두뇌'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 다음 글 '회사의 집단두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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