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씨, 후레쉬 38

by 주씨 후레쉬

■ 도토리 곳간이 비었습니다만


이번 주말은 딱히 일정이 없고, 비도 오고 그래서 원주 집에 다녀왔다. 본가 욕실, 베란다 리모델링한 모습이 궁금하기도 했고.


30년에 가까워진 오래된 아파트도 나름 과거의 '청구'라는 자부심으로 튼실하게 버티고 있다. 아직도 못이 잘 안 들어가는 벽이 있는 그 시대의 '청구' 기술력 마지막 건축 단지였던 그 아파트 욕실도 딱히 방수공사를 다시 하지 않는 것이 업자들의 룰이라고 한다. 워낙 방수도막이 잘 되어 있어 괜히 건드렸다 아랫집과 문제를 일으킨 적이 많다고, 타일 덧방시공을 추천했다고.


옥색 에메랄드 기운과 자주 루비 톤으로 세월을 보여주던 욕실은 베이지그레이 톤의 타일로 느낌이 확 바뀌었고, 오래된 SMC소재의 욕조와 개수대, 잡스러운 선반들은 사라져 있었다. 배관까지 조적식 벽에 넣어 깔끔하게 숨겨버려 나름의 요즈음 시대의 욕실 모습을 갖췄다. 푸른빛이 돌던 베란다 타일도 욕실과 마찬가지로 톤이 바뀌니 훤하게 밝아졌다.


서른 해에 슬쩍 못 미친 아파트에 인테리어를 다시 진행한 역사는 13여 년 전에 있었다. 아빠가 정년퇴직을 하시면서 이제 돈이 나올 구석이 딱히 없다고 판단한 엄마의 주도로 진행된 대수선이었다. 지금은 조금은 촌스럽지만 어쩌면 고풍스러운 우드톤의 인테리어는 나름 깔끔하게 잘 버티고 있다. 지금의 집도 엄마의 주도로 '주택은행'에 빚을 내 어렵게 들어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구입부터 관리까지 '박여사의 주도성'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원래는 이번 수선 비용을 보탤 작정이었는데- 서울에서 타향살이하는 귀여운 마흔살 막내의 손을 벌리기 싫은 엄마는 극구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집도 바뀐 김에 세탁기와 건조기를 새로 사드리기로 마음먹고 내려간 주말이었다. 금요일과 토요일 오전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지라 밖에 나가지 못했고, 햇살이 나오기 시작한 토요일 오후 하이마트와 삼성전자, LG전자 매장 순시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사실 칠십 대에게는 답이 정해져 있는 일이었다. 가전은 금성, 세탁기는 통돌이.


나름 합리적인 소비자로서 매장을 순시하며 아직 낡지 않은 눈과 뇌로 모델명을 기억했다. 그리고, 인터넷 검색을 했더니 세탁기든 건조기든 인터넷이 더 싼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런 모델들이 있구나 참고만 하고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현장에서 모델들을 본 엄마는 보다 큰 용량을 원하시는 듯했고, 딱히 쓰지 않아 쌓여있던 복지포인트와 개인 소지하고 있던 신세계 상품권을 탈탈 털었다. 이제 배송만 기다리면 되는 일은 나름 설렌다.


도토리 곳간은 비었지만- 어쩌면 엄빠의 마지막 인테리어 투자일지도 모르는 집수리의 '마지막 점' 하나는 내가 찍은 기분이라 뿌듯하기도 하고. 뿌듯하면서도 묘하다. 엄마와 나이가 비슷한 친인척들이 몸이 안 좋기도 하고, 종종 주변 어르신들이 현대 의학에서도 빨리 등지시는 것들을 보면- 그저 건강하게 오래 사시면 좋겠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가을 밤 이불 잘 두르고, 푹 자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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