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날의 한 순간

by 꿈꾸는 섬



꽤 오래전 일이다. VX2100 캠코더를 사서 주말이면 결혼식을 찍었다. 대학원에 다니던 시절이고, 그 주말 아르바이트가 유일한 수입이었다. 신랑신부가 서로에게 사랑을 전하는 모습을 담고, 하객으로 참가한 친구들의 축하메시지도 담았다. 60분짜리 테이프에 한 쌍의 부부를 찍을 수 있었다. 촬영을 한 테이프를 사무실에 전해주기만하면 내가 할 일은 끝났다.


카드 할부로 300만 원이 넘는 돈을 주고 산 캠코더 덕분에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었고, 다른 촬영 일도 하게 됐다. 그리고 결국(이라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내가 됐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사이트가 있었다. 영상촬영을 하는 사람들의 커뮤니티 같은 곳이었는데, 거기에 매일 자신의 일상을 찍어서 올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저 조용하고 느린 일상이었다. 눈이 내리는 신도림역에 기차가 들어오는 순간을 찍었고,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두런거리는 소리를 배경으로 소주잔을 찍은 영상도 있었다. 유튜브가 있던 시절도 아니었다. 어딘가 홈페이지에 영상을 어렵게 올리고, 스트리밍으로 영상을 보기도 어렵던 시절이었다. 그렇지만 나도 그런 영상을 찍고 싶었다. 느리고 조용한 일상의 순간을.


비가 내리는 밤이었다. 오피스텔 창가에 삼각대를 세우고 밤새도록 거리를 찍었다. 그 당시엔 그게 타임랩스라는 것도 모를 때였다. 그저 밤이 지나는 순간을, 비가 내리는 거리를 찍고 싶었을 뿐이었다. 비가 내리던 거리가 밝아졌고, 흐린 아침이 시작되는 걸 보고 캠코더를 껐다.


이제는 아파트가 들어선, 큰아버지 댁 포도밭을 찍었고 미국에 계신 엄마의 사촌 언니를 위해 폐허가 된 뒷동산을 찍었다. 그리고 뻘쭘하게 웃으며 인사를 하다 눈물을 흘리는 친척 형을 찍었다. 그 테이프는 언니를 만나러 가는 엄마 손에 들려 샌프란시스코로 날아갔다. 큰아버지 댁 포도밭 영상은 종종 큰댁에서 튼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이제는 구하기도 힘든 VHS테이프에 담겨 있는 그 저녁 풍경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연장들은 점점 더 좋아졌다. 렌즈도 늘었다. 이젠 밤새도록 카메라를 지키지 않아도 알아서 별이 떨어지는 하늘을 찍을 수 있고, 소주잔에 맺힌 이슬방울까지 찍을 수 있다. 흐린 날도 맑은 날로 바꿀 수 있다. 장비가 없어서, 기술이 부족해서 못 찍을 건 아무것도 없다.


어느 순간인가 일기를 적지 않는다. 하루하루가 비슷한 날들이다. 늦잠을 자거나, 한 시간이 넘도록 걷거나, 음악을 듣거나, 읽다 만 책을 읽거나, 멀리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비행기를 타거나.


몇 달 전부터 순간순간을 담고 있다. 신기하게 생긴 구름을 보거나, 웃기게 생긴 차와 마주치거나, 오래 머무르고 싶은 곳을 가거나,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거나 하는 순간을. 어쩌면 쓸모 없고 재미없는 순간을.


엄마를 모시고 병원에 가려고 아침 일찍 제주에서 올라오는 길, 창밖으로 작은 비행기가 내가 탄 비행기 곁을 한참동안 따라왔다. 멍하니 앉아 그 그림자가 다가왔다 멀어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어떤 날의 한 순간이 내게 남았다.


일기도 쓰지 않는 나는, 어쩌자고
심심한 순간들을 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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