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제철 식재료를 찾아 먹는 재미에 푹 빠졌다. 왜 제철 음식이라 하고 때맞춰 지역 축제를 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달래장 하나면 밥만 비벼 먹어도 맛있다. 거기에 하얀 두부라도 곁들이면 대단한 건강식을 먹는 것 같아 제법 뿌듯하다. 시금치는 제사 때나 먹던 나물이었는데 해풍 맞은 시금치에 한번 맛 들이면 시금치 빠진 된장찌개는 상상도 할 수 없다. 바지락도 제철에 맞춰 온라인으로 주문하면 배송 과정에서 해감도 되니 번거로운 것도 없다. 먹으리만큼 소분하여 냉동해 두고 야금야금 꺼내 봉골레 파스타며 바지락 칼국수며 한참을 해 먹는다.
다 커서 직접 음식을 해보고서야 깨닫는다. 고작이라던 반찬도 만들라치면 어지간히 손이 간다. 맛 좀 거든다고 곁들인 양념도 다듬느라 여간 애쓴 게 아니다. 접시에 흩어진 파, 마늘조차 알뜰히 숟가락으로 모아 먹던 엄마의 심정을 이제야 알아챈다.
얼마 전, 꼬막 철에는 양념 꼬막을 해 먹겠다고 장을 봐 와 싱크대에 풀어헤쳐 놓고 넋이 빠지고 말았다.
메추리알 조림 같은 거구나.
한참을 손질했는데도 한 움큼이다. 공도 모르고 순식간에 먹어버릴 판이다. 껍데기 위에서 양념을 품어 접시에 담기기까지 긴 여정을 그간 얼마나 하찮게 여겼는가.
“앞니로 속살만 쏙 빼내 먹고 마는데, 껍데기 한쪽은 왜 넣는 거야? 먹기만 성가시게.”
도시락에 껍데기 발라 먹는 반찬을 싸줬다고 사흘 밤낮으로 못마땅한 티를 냈다.
애써 손질하고도 순간만 애틋하게 음미하는 반찬이거늘.
귀한지 몰랐다.
싼값에 떨이로 들고 온 줄 알았던 식재료가 구하기도 어려워졌다.
머위나물, 빡짝장, 참지누아리, 서거리깍두기. 뒤늦게 추억으로 입맛을 다시며 산다.
바다에서 뜯은 참지누아리는 초장에 묻혀 먹으면 오독오독한 식감이 말도 못 한다. 깍두기에 들어간 서거리는 먹을 게 없어 보여도 씹을수록 삭 올라오는 감칠맛이 여느 젓갈 못지않다. 치킨 뼈 골라내듯 질겅질겅 씹어 하얀 뼈만 발라 먹는 재미가 어지간하다. 밥 한 그릇 먹는데도 뼈대가 빨대 한 봉지 만큼이나 쌓인다. 멋모르고 버려지는 생선 부위 같아도 서거리는 아는 사람만 아는 어른 맛이다.
어른 맛, 아버지 반찬 맛이다. 요즘 맛이 나는 햄, 비엔나소시지는 비싸서 못 먹으니 싸구려 나물이나 해 먹지. 그러니까 어른 맛은 구질구질한 맛이 틀림없다.
가난이라 오해했다. 부모님 나이가 되고 보니 세월만큼이나 진하고, 깊은 맛이다. 엄마가 해주던 맛이 그리운 건지, 제철 식재료 맛을 배운 미각의 본능인 건지.
옛날 음식이 그립다. 다 식어 빠진 도시락 반찬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가난하던 어른 맛을 찾기가 참 어렵다.
“내일 도시락 반찬은 뭐로 한다니.”
엄마는 밥때마다 부질없는 소리는 왜 하는 걸까.
고만고만한 반찬이다. 새로운 것도 없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반찬이거나 먹어도 줄지 않는 장아찌와 멸치가 고작이겠지. 하나같이 지겨운 나물인 데다가 애들 입맛이 아닌 반찬이라고 투정을 부렸다. 싼값에 받아온 먹거리로 만든 것이니 먹어도 배가 고픈 거라고 트집을 잡았다.
아침이면 현관 앞에 7개의 도시락이 놓인다. 온 가족 야근과 야간 수업 때까지 먹을 도시락이다. 엄마가 공장에서 점심으로 먹을 맨밥도 포함이다. 대충 고추장에 비벼 먹을 요량으로 챙겨간다. 정작 본인은 맨밥만 챙기면서 쇠푼이라도 벌겠다고 종종거리며 싸던 도시락이다.
반찬을 하는 김에 도시락 반찬으로도 손색이 없어야 하는데 만만치 않았을 터다. 아버지 위주의 장아찌, 나물, 김치류가 대부분이다. 꾀를 내봤자 볶음김치, 기껏해야 참치김치볶음이었다. 어쩌다 계란 묻힌 분홍 소시지를 싸준다지만 흔치 않았다. 되레 급하게 넣어 주던 고추참치와 도시락용 김이 특식같이 귀했다.
아침저녁 상에 올라온 반찬이 빤하다. 알면서도 내심 기대하는 자식들 마음도 헤아려야 하니 쉬울 리 없다. 다른 집 애들과 비교될까 봐 나름 고심하느라 뱉은 말이겠지.
철없을 땐 도시락 뚜껑을 여는 게 뭐라고 긴장이 됐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친구와 비교되어 창피했다. 친구가 내 반찬을 먹나 안 먹나 눈치를 보기도 했다.
도시락이 부의 상징도 아닌데 김칫국물이 배어있는 반찬통이 창피했다. 다 식은 계란 후라이에 김칫국물이 섞여 있는 것도 싫었다. 사실 계란말이를 싸 오는 친구에 비해 계란 후라이 하나만 덩그러니 올려져 있는 게 더 짜증 났다.
어느 날 반찬통을 열었는데 새까만 반찬이 있었다. 반찬 뚜껑도 까맣게 물들었다.
고무버섯이다.
부모님이 주말에 친구들과 산에서 잔뜩 따 온 버섯이다. 산에 다녀오신 날은 아이처럼 들뜨고, 말이 많으셨다. 삶고, 데치고. 거실에 신문지를 펼쳐놓고 말리느라 잔칫날만큼이나 분주하다.
‘한동안 또 저것만 먹겠구먼.’
내 맘 같지 않게 부모님만 신났다. 공짜 나물에 부자라도 된 듯 자랑을 늘어놓는다.
해가 더 길었으면 산을 반이나 옮겨왔을 기세다.
“나니까 이만큼 해 온 거야. 돈이 얼마어친 줄 알아? 돈 주고도 못 구해.”
“돈 주고 못 구하는 게 세상에 어딨어.”
고무버섯은 아빠가 참 좋아하셨다. 무채를 넣어 맑게 끓여 냉국으로 먹는다. 아삭한 양파와 함께 초고추장에 새콤달콤 무쳐 먹어도 좋다.
집에서 부모님만 즐기던 반찬을 도시락에 싸주신 거다. 이건 해도 해도 너무했다.
색깔부터 반찬으로서 자격이 없다.
“나도 처음 보는 반찬이야.” 아무도 묻지 않는 말을 해버린다.
손도 대지 않고 내심 엄마 보란 듯이 집에 도로 가져가 버렸다. 고스란히 남은 반찬의 의미를 모를 리 없다.
“왜? 맛이 없었어?”
엄마의 흐릿한 말속에 미안함이 가득하다.
지금은 고무버섯이 아버지 제사상에 올리는 제수 음식이다.
지난 제사에는 전염병으로 친척들이 올 수 없게 되자 엄마 혼자 지내겠다고 하셨다. 처량하게 남편 제사상을 차릴 모습이 애처로워 급하게 시골집에 내려갔다.
어김없이 고무버섯이 올려져 있다. 특유의 향이 집안 가득하다. 오랜만에 접하는 옛날 반찬이 반가워 숟가락부터 가져다 댄다.
“여전하네.”
“이젠 이 버섯도 구하기 어려워. 작년에 말려뒀던 게 마지막이야.”
이모가 주민만 채취할 수 있는 산에서 매번 송이버섯과 함께 보내주셨다. 최근 여러 차례 큰 산불을 겪으면서 그야말로 씨가 말라 버렸다. 산에 가면 늘 있는 줄 알았더니 정말 돈 주고도 못 사게 될 줄이야.
못마땅해하던 식재료가 더는 구하기 어려워졌거나 터무니없이 비싸지고서야 깨닫는다.
참 귀한 음식을 먹고 자랐구나.
지나고 후회하는 게 이렇게 또 늘어간다.
제철 음식 앞에 부린 투정이라 계절 바뀔 때마다 뉘우친다.
참 가혹한 노릇이다.
사진출처: 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