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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인표 Feb 25. 2024

탈이 좋잖아


어제는 무슨 그림을 그렸나.

문 닫힌 미술학원 안을 둘러본다.

러닝을 하러 갈 때 지나치는 미술학원이다. 아주 작은 교습소지만 붓, 캔버스, 팔레트만으로도 숨겨진 핫플레이스 못지않게 예쁜 공간이다.


몇 개월 지켜보자니 사장님이 여간 부러운 게 아니다. 우선 자기 기술 갖고 운영하니 인건비가 들지 않는다. 어린이나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곳이라 입시 경쟁을 하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아이들 그림을 온종일 볼 수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큰 힐링일까. 비율도 맞지 않는 밑그림에 생각대로 막 칠한 어린이 그림은 감히 흉내도 낼 수 없다.


'그림 기술을 전문적으로 배웠으면 밥값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못 가본 길이 아름답다고 창문밖에 서서 시답지 않은 꿈을 그려본다.




국민학교 때 그림과 글 중 하나를 선택해 꿈으로 키워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가난한 집안 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물어보나 마나 한 말이다. 그래도 내심 선생님 핑계를 대고 미술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운을 떼봤다. 당연히 안 되는 일이다. 학원비보다 재룟값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하셨다.


그때부터였다. 소질 있는 분야를 <비전문적>으로 딱 비전문가 수준만큼만 야금야금 섭렵하며 산다.


그림도 그리지만 대학을 갈 만한 수준이 아니다. 글도 쓰지만 등단할 만큼 잘 쓰지 못한다.


어릴 적에 갖지 못한 장난감이 한이 된 어른처럼 서른 중반이 되어 홍대 앞 미술학원에 다녔다. 못해본 엘리트에 대한 자격지심인지 취미 미술인데도 홍대 앞 학원을 선택했다.

그래봤자 졸업장과 자격증도 없고 경력조차 없으니 그저 취미 미술일 뿐인데 왜 그랬을까. '홍대 앞 미술학원 수강생'이라는 신분이 뭐라고.


마흔이 넘어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작가라는 호칭을 얻었지만, 등단한 작가도 아니고 책을 낸 경험도 없으니 또 비전문가 솜씨를 부린 격이다.


'그래도 여기서는 작가라고 해주잖아. 홍대 앞 미술학원 수강생보다 낫지.'


올해는 오랜만에 의욕이 생겨 '글쓰기' 기술을 파고 있다.

유명한 작가의 강의를 들어볼까, 등단 작가와 함께하는 글쓰기 프로그램을 등록해 볼까.

매몰되지 않는 글을 쓰려면 글쓰기 모임에라도 나가봐야 하나.


광고 속 강사 프로필을 가만 보고 있자니 여기도 '증' 싸움이기는 매한가지다.

당장 나 또한 번듯한 타이틀, 약력을 훑고 있지 않은가.


영화 대사가 생각났다.

"탈이 좋잖아."


회사에서 교육프로그램 강사를 배정할 때도 자주 사용하던 말이다. 강사 프로필이 좋아야 감사를 받아도 안심이 된다. 실상은 실무 경력자보다도 못한 강의 실력이다. 프로필이 좋은 강사는 연구 실적이 좋거나 소속기관 프리미엄으로 Pool에 포함된 것일 뿐 강사의 역량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나 또한 편하다고, 부담 없이 일하려고 탈이 좋은 강사를 썼으면서 새삼 '이력'에 털썩 주저앉는다.


글쓰기도 결국 미술학원 선생님처럼 기술이 되려면 타이틀이 필요하다. 돈이 되려면 돈이 될 만한 프로필이 요구된다.


작가로서 탈이 좋은 선수가 되려면 또 얼마나 지나야 할까. 글쓰기 기술을 배우기도 전에 '포기할 이유'를 굳이 찾은 모양새다.


결국 어렸을 적 소원대로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있는데 출발점이 느린 만큼 걸림돌이 많다.


이래서 애들 재능은 어렸을 때부터 발굴해 줘야 하는 거구나.

자식도 없으면서 괜한 깨달음이다.



사진출처: 사진: Unsplash의 CE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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