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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인표 Feb 28. 2024

옜다,

내 감성



있을 법도 한데.

동네 작은 도서관에 집착하느라 하루에도 열댓 번씩 도서 검색을 하고 앉았다.

5분 거리 주민센터 2층에 있는 작은 도서관이다.

7년을 살면서 쳐주지도 않다가 이제 와 좋아 죽는다.


작은 도서관이라 책이 많지 않다. 하물며 찾는 책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도 책가방 서비스를 이용하면 관내 도서관에 있는 책을 가져다주겠단다.

책가방. 말도 참 곱지.


오랫동안 시행한 서비스에 뒤늦게 탄복하며 '전체 검색' 삼매경이다.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받아 보는 건 대학원 졸업 이후 처음이다.

월 20권씩 대출이 가능했다. 이케아 쇼핑백만 한 가방에 잔뜩 넣어 장사꾼처럼 집으로 지고 날랐다.

당시 스마트폰이 블랙베리였던 것도 한몫했다. 책 읽는 속도가 휴대전화 속도보다 빨랐다. 휴대전화로 할 수 있는 것보다 책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았다.


활자의 속도로 글을 읽고 종이를 넘기다 보면 가끔 생각지 못한 타인의 흔적을 마주하기도 한다.


잘 말린 빨간 단풍잎.

누구의 가을 감성일까.


빌려 읽는 책이라 가능한 일이다.

언제, 어떤 책에서, 어떤 방법으로 감동을 줄지. 예측할 수 없는 이벤트를 받는 기분이다.

같은 책을 공유한 사람의 마음이 고마워 잘 감상하고 부서지지 않게 제자리에 놓아두었다.

다음 이에게도 기쁨이 전달되길.




작은 도서관에서 처음으로 빌린 책.

저자 소개부터 작가의 말, OO에게.

속표지 한 장도 빠짐없이 훑고 시작한다.

지은이, 펴낸이, 편집, 마케팅. 출판사 정보도 빼놓지 않는다. 작가와 함께한 시간이 이름에 담겨 있다.


그러다 무방비 상태에서 타인의 흔적을 마주했다. 예측할 수 없는 깜짝 이벤트여야 하는데 너무 빨리 찾아왔다.


책 사이 터진 채 말라버린 파리.

-누가 책으로 파리를 잡았습니까.-


곳곳에 빨간색 모나미 볼펜으로 대충 그은 줄이 삐뚤빼뚤하다.

'무연히', '난분분'.

낯선 부사와 어근에 굳이 한문을 찾아 적어두었다. 내 의사도 묻지 않고 왜 뜻풀이를 해두었냐고 따질 수도 없다.


평소 종이가 구겨지는 것도 싫어 모서리도 접지 않는다. 펜으로 밑줄 긋는 일은 더더욱 없다. 마음에 드는 문구는 사진을 찍어 핸드폰에 저장해서 두면 된다.


내 맘 같지 않다손 치더라도 누가 책을 이렇게 다루었을까.

책에다 온갖 난도질을 한 것도 모자라 물을 엎질러 놓은 격이다.


내 안의 모든 자아를 불러 모아 파리 처리 문제를 놓고 심도 있는 시뮬레이션을 돌려본다.


파리가 떨어지지 않게 조심히 책을 읽는다. 그러다 겹친 종이 끝이 파리를 건드린다. 못 본 새 침대 어딘가에 부스러기가 떨어진다. 뒤척이다 날개처럼 생긴 잔해를 조우한다. 최악이다.

그렇다고 치우자니 터진 형태가 참 흉측하다.

물티슈로 닦을 수도 없고, 티슈로 긁으면 되나. 납작한 자로 긁어낼까.


단풍잎과 어찌 이리 다른 타인의 감성인가.

걷다가 개똥을 밟은 기분이다. 나만 보고 말자. 단풍잎도, 은행잎도 아닌데 공유해 무엇하겠는가.


얼굴 주름이 이렇게 많아도 되나 싶은 표정으로 파리를 털어냈다.

거사를 치르고 돌아서는데, 화병에 한창 퍼드러진 곱슬 버들이 눈에 들어온다.


'옜다, 내 감성.'

곱슬 버들가지를 잘라 책 사이에 넣어 두었다.


이 작가가 좋아 책을 고른 그대가 기분 좋게 읽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사진출처: 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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