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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인표 Mar 08. 2024

작가 잘못이 아닙니다,

숏츠에 중독돼서 그만.


영상도 아닌데, 단편소설에 빠졌다.

신개념 숏폼이랄까.


평소대로 라면 단편집을 애써 빌려 읽지 않는다.

이야기가 재미있을 만하면 끝나버린다. 좋게 얘기하면 여운이 남는 글이고, 나쁘게 얘기하면 개운치 않은 글이다.


그런데도 단편집 네 권을 빌렸다. 최근 좋아하게 된 작가가 장편소설이 많지 않아 선택의 여지 없이 읽는다. 그래도 글이 얼마나 재밌는지 읽다 만 것 같이 서운하지는 않다.


작가가 문예지에 발표한 소설을 엮어 출간했다. 단편 소설이라지만 300페이지에 가까운 글이다.

한편 한편이 농도를 잘 맞춘 전분을 넣어 국물을 잘 잡아준 요리 같다. 가볍지도, 묽지도 않은 글이다. 구색을 갖추느라 욱여넣은 글도 없이 조화롭다.


짧은 글이 문제가 아니었구먼!

이마를 '탁' 치고 만다.


그래도 뇌 구조가 여간 의심스러운 게 아니다.

먹다 뺏긴 밥그릇에 황당한 나머지 화도 낼 수 없는 표정으로 식당 주인을 원망하는 눈을 하고선,


"글을 이렇게 끝내버린 작가는 반성하라."를 외치던 내가.

단편소설에 빠져 휴대전화를 내려놓다니.


작가가 무책임하게 남겨 놓은 여운에 의미까지 찾으려 애쓴다. 그러다 뒷부분을 내가 한번 써볼지 하는 생각도 하고 앉았다.


이쯤 되면 정말 뇌가 잘못된 게 맞다.

그간 브런치 시스템에 세뇌당하고 학습된 게 틀림없다. 그렇게 쇼츠와 릴스를 못 끊더니 중독된 게 분명하다.


브런치북이 그런 거 아니겠는가.

발행하거나 연재한 단편을 모아 출간한 책.

매한가지로 엮어 만들어진 책.


사실 브런치 글이 너무 짧아 활용하려면 살을 어지간히 붙여야 하고 결국은 다시 쓰다시피 해야 한다.


몇 주 전 두 편의 글을 심폐 소생하느라 반죽 덩어리를 얼마나 내리쳤는지 모른다. 수타 장인도 울고 갈 지경이다. 군더더기 없이 쓴다고 도려내고 생략했던 글에 쓸데없는 이야기를 쓸모 있게 붙이려니 이만한 난제도 없다.


비슷한 분위기의 스토리를 덩어리째 추가하고, 연결부위를 매끈하게 다듬는다. 그러다 덩어리, 덩어리가 반죽 내리치듯 찰진 소리가 나는 시점에 이르면 그야말로 쾌재를 부른다.

대단한 플롯으로 반전과 감동의 대서사를 이뤄낸 듯 의기양양이다. 겨우 글 구실을 하게 만들어 놓고 보니 A4 한 장에 출제된 수학 문제를 빼곡히 풀어낸 기분이다.


"어디 올림피아드 문제라도 내 보시지."




브런치로 헤아림을 학습한 모양이다.

쓰는 사람의 마음을, 써 놓은 글에 대한 애정을.

한 권이 되기까지의 여정을.


거기에 숏츠에 중독돼 남다른 농도와 점도를 장착했으리라.

짧지만 강하게, 알고리즘에 맞게 끈끈하게 연결된 조각들.


단편집,

그게 그러니까 요즘 시대와 뇌 구조에 딱 맞아 착 감겨버렸다.


같이 빌렸던 장편 소설책은 다 읽지도 못하고 반납했다. 요즘 제법 인기가 있어 예약 대기가 걸린다는 신간이었는데 집중해 읽기가 어려웠다.


'장편소설을 쓰기까지 작가의 노고를 외면하는 건 아닙니다. 숏츠 탓입니다. 제가 숏폼에 중독돼서 그만.'

 

  


사진 출처: Unsplash의 N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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