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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인표 Mar 09. 2024

우리 집 비밀번호는요,


‘정말 죽을 뻔했네.'


평소 죽고 싶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으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벽걸이용 화분을 걸려고 30개짜리 휴지 팩을 딛고 올라섰다가 넘어지고 말았다.

머리뼈부터 더듬어 본다.

바닥에 머리를 어찌나 세게 부딪혔는지 금이 간 부분이 없어도 있어야 할 판이다.


설상가상으로 보리차를 끓여놓은 10리터짜리 주전자가 머리 위로 꼬꾸라진다. 들고 있던 화분의 흙이 온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와중에 식물이 다칠까 봐 손목을 꺾으며 팔을 위로 들어 올린 자세를 취했다.


‘순발력과 판단력 보소.’

누운 채로 쓱 미소를 지어본다.


흙과 물을 야무지게 뒤집어쓰고 나니 전쟁통에 버려진 아이 몰골이다. 얼굴에 땟국물이 장마철 개천 범람하듯 흘러내린다.


이대로 자버릴까.

젖은 옷과 머리카락 그대로 모로 누워 몸을 동그랗게 말아본다. 어처구니가 없어 흐린 눈을 해버린다.


그사이 가구와 옷이 쉬지 않고 보리차를 먹고 있고, 머리카락은 흙에 뿌리를 내릴 기세다.


그러다 싱크대 문에 비친 나와 눈이 마주쳤다.

전쟁통에 버려진 아이라기보다, 기력이 없어 일어나지 못하는 노인에 더 가깝구나.

놀란 근육 탓인지, 보리차에 빠진 까닭인지 일어날 수 없었다. 몸이 천근만근이다.


아무도 찾지 않으면 이대로 죽는 건가.


불현듯 며칠 전 도어락 비밀번호를 바꾼 게 생각이 났다.

비밀번호를 알고 드나드는 친구가 딱 한 명 있다. 공교롭게 최근 쌈질을 하고선 홧김에 비밀번호를 바꿔버렸다.


쓸데없는 짓을 했구먼.

주섬주섬 조용히 일어나 비밀번호를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발견은 돼야지.’


옛날처럼 우유를 배달해 먹는 것도 아니고 '밤사이 안녕'을 알릴 방법이 없다.


의자 끌어오는 게 귀찮아서 휴지 팩에 올라선 대가가 혹독하다. 청소하는 품이 더 들게 생겼다. 또 대충 하려다 된통 당하고 만다.


유치원을 안 나온 탓인가.

초등학생도 하지 않을 짓을 하고 애먼 집구석을 원망해 본다. 가난이 공포라더니 유치원만 나왔어도 좀 더 과학적인 발상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유치원을 나왔더라면, 비밀번호를 친구 모르게 바꿔버렸을 텐데.





사진출처: Unsplash의 yang mia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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