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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인표 Mar 13. 2024

광기

狂氣


그렸던 그림을 쭉 펼쳐놓고 나니 매 먹을 거뿐이다. 값이 올라 사 먹지 못하는 음식을 잔뜩 그려놓았다.


3,500원 하던 계란값이 두 배로 올랐을 무렵, 일주일 내내 계란 후라이를 그리며 시작되었다. 


인물화와 비슷하다. 상대의 주름, 점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정작 본인이 숨기고 싶어 하는 좌우 비대칭 눈썹, 도드라지는 광대마저 잡아내 그리다가 애정이 생겨버리는 관계.

그림을 그리는 동안 아주 깊이 관찰하며 더 애틋해진다. 


그런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을 뿐인데 먹을 거뿐이라니 참 궁색하구나.


계란은 흰자와 노른자 맛이 어찌 이리 다를까. 흰자는 흰자대로, 노른자는 노른자대로 맛있다.

그리 비싸고 맛있는 삼겹살도 비계는 비계대로, 살코기는 살코기대로 맛있는 게 아닌데.

작고 소중한 알이 맛있는 맛을 두 가지나 내어주다니 기특해 죽겠다.


수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달짝지근한 분이 올라와 있다. 밤새 소복이 내려 아무도 밟지 않은 눈과 같다. 보드라운 눈을 손바닥으로 훑어 나를 새기듯 손가락으로 한번 눌러보고 싶은 지경이다. 

시원하고 건강한 맛일 테지.

조각낸 수박과 윤기가 잘잘 흐르는 딸기 그림을 펼쳐놓고 눈으로 씹고 뜯고 즐기고 맛보고.


이 무슨 광기인가.


요즘은 오이를 그리느라 여념이 없다. 라면 한 팩보다 비싼 오이를 살 엄두가 나지 않아 그림으로 입맛을 대신한다. 이러다 오이소박이, 오이 달래 무침도 할머니 집밥 그리워하듯 추억 속 음식이 될 판이다.

며칠 전에는 샐러드에 조금만 넣어볼 요량으로 손을 뻗었다가 이내 거두고 말았다.

차라리 샐러드를 포기하고 말지, 귀하다고 고이 모셔가며 먹을 수 없는 노릇이다.


“오이는 원래 겨울에 비싼 거야.“

3개 4천 원에 팔던 채소가게 아줌마의 구실 좋은 말이 쏙 들어가 버렸다. 본인도 달래와 냉이, 봄동을 같이 파는 계절이 되니 말하기 민망했겠지.


물가가 더 오르면 그림 솜씨만 늘게 생겼다.

사과도 그려야겠고, 토마토도 그려야겠고.

오픈런도 아닌데 줄줄이 대기 중이다.


배를 곯고 사는 것도 아니면서 사 먹을 엄두가 나지 않는 식재료를 보면 환장한 사람처럼 먹고 싶어진다.

못 가진 자의 욕심인가, 아는 맛에 대한 욕구인가.


게다가 마라톤을 앞두고 식사량을 조절하다 보니 음식에 대한 집착이 더 늘었다.

하지 말라고, 먹지 말라는 제한에 그야말로 무지성으로 삐뚤어지는 사춘기 십 대가 따로 없다.


이번 주 내내 매운 닭발에 소주병을 그리고 앉았다.

다음엔 레드윙에 소주를 그릴 예정이다.

치즈피자에 소주도 그려야지.

양꼬치에 소주도 맛있겠다. 불족발도 괜찮지. 근본은 아무래도 삼겹살에다 소주가 아닐까.


그래, 소주가 문제로구나.




사진출처: 구글 이미지(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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