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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인표 Apr 06. 2024

왜 자꾸 너네는 역경을 이겨내니


책, 샴푸 뒷면에 적힌 사용법, 화장품 성분, 티슈 곽에 쓰인 사용 시 주의 사항.

그야말로 글자로 된 건 무조건 읽는다.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 유독 심하다. 


직면하는 게 두려워 문제를 외면하려고 사용하는 비겁한 치유법이다.

나름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건강한 방법이라 여겼지만, 작년 병원 일을 겪고 나서는 이마저도 효능이 예전 같지 않다. 온 정신을 책에만 집중하려 무던히 애쓰는데도 못내 불안하고 부아가 치민다.




자식 하나는 병상에 누워 대소변도 가리지 못한다.

다른 자식새끼는 간호하느라 밤에도 잠을 못 자고, 낮에는 형제의 살아온 인생을, 버텨온 터전을 정리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그런데도 엄마라는 사람이 병원 복도 의자에 다리를 올리고 앉아 유튜브를 보고 있다. 순간 엄마가 충격으로 치매에 걸린 줄 알았다.


나만 잊지 못하는 장면이라 지금도 입 밖에 내지 않고 애써 들추지 않는다.

그런데도 요즘같이 기를 쓰고 책을 읽을 때면 기어코 기어 나와 상처가 되어버린다.


내가 책을 읽는 것처럼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어 유튜브를 봤으리라 짐작한다. 도저히 버틸 수 없어 강아지 털 깎는 영상을 찾아보고 지긋지긋한 트로트 프로그램을 봤던 것이라 믿고 싶다.


짐작이, 믿음이 맞아야만 한다.

그런데도 분노가 치밀어 오르니까.


코로나로 병실 내 보호자 인원이 제한됐다.

병원 복도까지 나갈 수 없어 엄마에게 급하게 휴대전화로 연락해 보지만, 전화가 끊기기 일쑤였다. 영상을 보다가 버튼을 잘못 누른 것이다. 엄마가 있는 곳까지 뛰어가서 말해야 할 만큼 영상에 집중했다.

코앞에서 어깨를 두드리면 그제야 웃으며 올려다본다. 나를 보고 반가워 미소를 띤 게 아니라 재밌는 영상을 보느라 미처 거두지 못한 표정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엄마까지 왜 그래? 한 명 간호하는 것도 힘들어. 나는 지쳐가는데 유튜브를 보며 웃어? 지금 웃음이 나와?

엄마 아들이 누워있잖아!-


나의 잘못으로 발생한 일인가. 내가 책임지고 해결해야 하는 일인가. 몸이 지쳐버리니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어 되바라지고 못된 생각에 매몰된다.


생각이 행동이 될까 봐 더 두려웠다.


어깨를 강하게 흔들어 정신 좀 차리라고 외치고 싶었다.

목이 쉬도록 소리를 내지르고 싶었다.

손가락뼈가 다 으스러지도록 벽을 내리치며 분노를 표출하고 싶었다.

어떤 말을 하고 어떤 모습을 보여야 지금 내 심경을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나도 지치고 힘든데 정신을 부여잡고 있는 거라고,

하기 싫은 일을 전쟁같이 치르고 있다고,

살려서 집에 데리고는 가야 할 거 아니냐고.


뱉지도 못할 말을 속으로 비명처럼 질러댄다.


"엄마, 유튜브가 재밌어?"

"그냥 보는 거야."


"그래…. “


1주일을 줄곧 함께 다닌 길이라 택시를 타고 혼자 오실 수 있는지 여쭈었다. 엄마를 모시러 가서 다시 이동할 시간과 체력을 아끼려 했을 뿐이다.


"엄마, 택시를 타서 포스코 아파트 앞 버스 정류장에 내려달라고 해. 문자도 넣어뒀으니, 기사님한테 문장 그대로 보고 말하면 돼."

"나는 모르지."

"뭘? 택시를 탈 줄 모른다고?"

"나는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택시를 탈 줄도 몰라."


걱정과 분노가 한 끗 차이다.

지역은 달라도 대한민국에서 택시를 잡아타는 방법은 매한가진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화가 났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택시를 타면 전화해서 기사 아저씨를 바꿔줘."


"엄마, 아깐 왜 그랬어?"

"이젠 나이가 들어 그런가, 엄마가 정신이 가끔 멍-해서 말을 빨리 못 알아들어."

"그럴 리가 있나? 나 좀 도와줘. 지금 정신을 놓으면 어떻게 해. 오빠를 집으로 데리고 가야 할 거 아니야?"


책 위로 장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영사기 필름 돌아가듯 재생된다.


내가 책을 방패 삼아 도망친다.

엄마가 유튜브로 눈과 귀를 막는다.

똑같이 현실을 외면한 건데 왜 화가 났을까. 왜 그날이 지금도 상처가 될까.

자책과 분노가 칼날이 되어 귓가에 내리꽂힌다.


"엄마, 오빠가 응급실이래."

엄마가 아침 첫차를 타고 오겠다고 했을 때,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았는데 간사한 마음이 들고 말았다. 곁에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두려울 게 없었는데 은혜 모르는 까치가 되고 만다. 


대상이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어 원망하고 분노할 상대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그러면 안 되지. 얼마나 후회하려고.

질책하듯 반성하듯 생각이 글자가 되어 원래 글을 읽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른다.


걱정 인형에게 근심을 떠 안기듯 브런치에 속상함을 떠넘기는 글을 내갈긴다.

봉인하듯 속상한 글을 지껄여둔다.

사그라지지 않는 분노와 서운한 감정, 생생한 장면을 기록해 밀봉한다.


역시나 소설처럼 내 글이 행복하지 않다.


이 와중에 읽고 있는 책은 또 쓸데없이 긍정적이다. 어쩜 다들 어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찾아 행복하게 잘도 사는지.

하다 하다 소설 속 등장인물이 역경을 이겨내는 꼴에 잔뜩 골을 내고 앉았다.


-왜 자꾸 너네는 역경을 이겨내니.-



사진출처: Unsplash의 Lucas Me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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