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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인표 May 03. 2024

자가용이 있던 사람


새댁인 엄마가 도로 위로 나동그라졌다. 아버지 오토바이를 차가 뒤에서 들이박아 버린 것이다.

이놈의 오토바이.

네 식구가 되고서도 우리 집 이동 수단은 여전히 오토바이였다. 형편이 나아지지 않았단 소리다.


둘씩 버스와 오토바이에 나눠 타고 집에서 보자고 했는데 아버지 오토바이가 보이지 않았다. 먼지가 그치길 기다리고 몇 번을 돌아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버스를 세우라며 다급하게 손짓하는 동네 사람들의 오토바이가 버스 옆으로 붙어 선다.


아버지 오토바이가 사고가 났다는 소리에 엄마는 아들까지 한꺼번에 잃는 줄 알고 그야말로 혼비백산이었다.

저놈의 오토바이.


차 살 돈은 없는데 떡 배달은 해야 하고 먹는 물도 떠다 날라야 했다. 그러니 사람이 다치는 건 둘째가 되고 마는 최고로 비싼 재산이었다. 귀한 몸치곤 도로에 나자빠지고 논두렁에 구르느라 바람을 막는 용도인지 뭔지 하는 플라스틱은 구멍이 숭숭했다. 달군 송곳으로 구멍을 내어 철사로 야무지게 엮어놓았고 철사는 당장 파상풍에 걸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벌겋게 녹이 슬어 있었다.


그사이 오토바이 몸통이 빨간색이었다가 파란색이 되곤 했지만, 자가용도 아닌 오토바이를 중고로 사고파는 건 내가 쳐주지도 않았다. 좀 사는구나 하려면 자가용쯤은 돼야지.

자가용이 뭐라고 아파트에나 사는 사람들 것이겠거니 전설 속 용 그리듯 했다.


중학생이 되고서야 아버지가 자가용이라는 걸 집 앞에 끌어다 놓으셨다.

길기도 길었던 은색 스텔라.

몇 년산인지, 몇만이나 탔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깍두기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각이 졌나 기겁했던 기억이 난다. 은색인데 갈치보다도 못한 광택이 나던 빛바랜 중고차였다. 아무리 닦아도 반짝이지 않았고 벨벳으로 된 회색 시트는 덥고 따갑기만 했다.


그래도 지붕이 있으니 이젠 사고가 나도 허공으로 나가떨어질 일이 없겠구나, 집이 이제야 돈을 좀 벌어 살만해졌구나, 자가용으로 위안을 삼았다.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다더니 아파트에 살지 않는데도 자가용이 생겼으면서 이상한 창피함과 수치심이 들었다. 고등학생 딸을 학교에 태워다 주고 싶었던 아비의 마음도 몰라주고 교문에서도 교차로 하나만큼 떨어진 곳에 내려달라고 짜증을 부렸더랬다.

자동차가 창피했다. 소나타가 아니라서, 검은색으로 반짝이는 차가 아니라서 창피했다. 누가 볼까 봐 급하게 차에서 내려서 뛰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부모가 몰랐을 리 없다.

현대 스텔라 길이만큼이나 후회와 연민이 늘어지는 기억이다.


고3이 되던 해 드디어 광이 나는 두 번째 자동차가 생겼다.

또 중고차.

진한 청록색의 기아 크레도스.

무엇보다 곡선이 진 뒤태가 고급스러웠고 진한 컬러라 그런지 햇빛에 유난히 반들거렸다.

마치 사장님 책상 위에 놓인 명패 같았다.


“내가 이 차를 다 타고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또 몇만을 탄 중고차를 사 왔기에 저런 소리를 하나 싶었다. 그리고 1년도 채 못 타고 아빠가 돌아가신 후에야 무슨 말인지 알게 되었다. 건강검진을 다시 하라는 의사의 권고는 아빠와 직장 동료만 아는 비밀이었다. 왜 아내에게조차 말하지 않았냐고 회사 사람들 멱살을 잡고 울며 매달렸을 땐 이미 수술도 할 수 없이 늦었다는 진단을 받았을 무렵이었다.


아버지의 두 번째 중고차 크레도스는 춘천에서 대학에 다니던 오빠가 가져갔다. 면허를 가진 사람이 오빠밖에 없었거니와 시동도 걸어줘야 한다며 세워놓고 놀리면 안 된다고 했다. 그렇게 6년을 더 타고 부품을 구하기도 어렵고 수리비가 폐차비보다 더 든다는 소리를 듣고서야 처분, 사라지는 아빠의 마지막 자가용이 되었다.


석·박 공부만 하다 드디어 학벌 값을 하는 직장인이 된 오빠가 우리 집 최초로 새 차를 샀다. 평생 중고차 밖에 못 탔던 아빠와 달리 새 차를 현금 일시불로 구입한 것이 엄마에게는 석·박만큼이나 대단한 자랑이었다.  

은색 아반떼 하이브리드.


차가 멈추면 엔진이 함께 멈춘다며 연비가 좋다고 자랑했다.

젠장, 나는 스틱 차를 몰면서 시동을 자주 꺼트렸던 기억 탓인지 짜증 나는 승차감이었다.

좀생이, 샌님 아니랄까 봐 꼭 자기 같은 차를 골랐구먼.


작년, 본가에 오빠를 아반떼로 옮겼다.

장롱 면허가 되어버린 나를 대신해 큰이모부가 운전하셨다.

정상 수치를 회복하고 퇴원했지만, 오빠의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 운전을 대신하는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다며 춘천 길을 안내하기도 했고, 외국도 아닌데 뜬금없이 신호체계를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다 신호대기를 하느라 아반떼 시동이 꺼지자, 나에게 했던 말 그대로 이모부에게 자랑을 해댔다. 정신이 혼미해도 자식을 알아보는 부모처럼 춘천과 아반떼 하이브리드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오빠는 본가에서 한 달쯤 요양하고서야 혼자 집 앞까지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제야 주차인지 방치인지 미동도 하지 않던 아반떼가 눈에 들어온 모양이다. 시동을 걸어줘야 한다며 차 키를 들고 나섰다. 30분이 넘어도 들어오질 않는다. 시동을 끄고 켜는 법을 잊어버린 걸까, 앉았다 일어나질 못하는 건가, 불안했다.


“내버려 둬. 우린 지켜보기만 하면 돼. 괜찮아. 혼자 할 수 있어.”

엄마는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나가보겠다는 나를 말리려고 하는 말인지 도무지 모를 소리를 하며 내 팔을 붙든다.


그러다,

“너 주행만 따로 돈 내고 연습하고 와라. 저 차, 네가 몰아야 하지 않나? 돈 걱정은 말고 3회든, 10회든 안전하다 생각될 때까지 주행 연습하고 와. “


아버지의 크레도스를 오빠가 끌고 갔던 순간처럼 오빠의 아반떼가 제철소 철광석만큼이나 무섭고 무겁게 느껴졌다. 아빠의 크레도스가 서있던 집 앞 도로변에 오빠의 아반떼가 일 년째 주차되어 있다.


오빠도 안다. 이제 운전할 수 없다는 것을.

나도 안다. 오빠의 차를 몰기 위해 주행 연습을 하게 되면 영영 서울 나의 터전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오토바이를 타다가 형편이 좋아져서 자동차가 생긴 건데 이게 생긴 건지, 잃은 건지 모르는 삶이 되어버렸다.




사진출처: 스텔라 광고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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