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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인표 Jul 30. 2023

살겠다고 엄마 밥을 얻어먹는다


고모가 두 명 있었다. 생사를 모르지만 과거형이다.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고모들은 서울말을 쓰고 외동아들을 키웠다.

말투가 벌써 부잣집 사람이다. TV에 나오는 사람과 같은 말투를 쓰니 고급스럽다. 고모네 <외동> 아들은 밥 먹으라고 부르면 집 안에 있는 나무 계단을 뛰어 내려올 것이다.

흙밭에서 놀다가 뛰어가는 우리 집과는 다르겠지.

서울말을 쓰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고모들과 자연스레 연락이 끊겼다.




오빠가 아파 집안 제사가 없는 일이 되었다. 집에 우환이 생기면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란다. 엄마는 정성껏 제사를 모셨는데 아들을 저렇게 해놨다며 괘씸해서라도 안 지내겠다 하신다.

그게 어디 조상 탓이겠는가.

엄마는 하늘이 야속하다.


오빠는 스스로 걸을 수 없다. 계단이 있는 집 밖을 나갈 수 없어 본의 아니게 숨어 지낸다. 퇴원을 도왔던 이모부는 오빠가 걸을 수 있을 때까지 나가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하신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손가락질받을 만한 일도 아닌데 숨을 일인가.


20여 년 만에 아빠와 같은 병을 얻어 고향으로 내려온 아들은 남 얘기 좋아하는 사람에게 안줏거리가 되기 충분했다.


제사가 취소되는 바람에 오빠가 본가에서 요양 중이라는 소식이 삽시간에 퍼졌다.


40년 넘은 이웃부터 엄마의 지인까지 봉투와 함께 보양식을 만들어 찾아온다. 일어나지도 못하는데 인사받을 것도 아니라며 현관문 안으로 고개도 들이밀지 않았다. 한동안 엄마는 문밖에 나가 돈과 음식을 받아왔다.


뒤에서 엄마의 박복함을 숙덕 댈지 몰라도 부모님이 덕을 잘 쌓은 것 같아 내심 감사하다.


그러다 수도권 고모 이야기가 나왔다.


아버지 장례식 때 조의금으로 3만 원을 냈단다. 모르는 사람도 뭐든 해먹이라고 5만 원, 10만 원을 들고 와 걱정한다. 그런데 TV에 나오는 사람처럼 서울말을 쓰던 고모들이 3만 원이라니.


20여 년 전이라 해도 상식적이지 않다. 통상 장례 비용을 일부 부담하거나 다른 도움을 줬을 법한 관계 아닌가.

출가외인이지 생판 모르는 타인은 아닌데 야박했다.


서울에 살면서 그들의 삶도 팍팍했으리라 딱하게 여겨본다. 그래야 아버지께 덜 미안할 것 같다.


돈 몇만 원에 생각이 많아진다.



3년 전 외삼촌이 마지막을 보내고 계신 요양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그 주를 넘기기 어렵다고 했다.


외삼촌, 엄마의 오빠.

항상 진한 머릿기름 냄새가 났다. 가르마는 자를 대고 밀어놓은 듯 한 치의 오차도 없다. 무엇보다 성격이 대쪽 같았다. 그러던 외삼촌이 배변 실수가 잦아지면서 그토록 저항하던 요양병원에서 마지막을 보내고 있었다.


일주일 후 장례를 치렀다.

외삼촌은 자녀들이 많지만, 엄마가 반쯤 되는 장례비를 부담했다.


그때 오빠에게 농을 던졌다.

"오빠는 내가 깨끗하게 잘 보내줄게."


전화를 받고 응급실에 있는 오빠에게 가던 날 차 안에서 수백 번, 수천 번 후회하고 반성했다.

농담이라도 하면 안 되는 말이다. 말이 힘을 얻어 오빠가 아프게 된 것이리라.




자식 가진 부모가 죄인이라 남한테 함부로 나쁜 소리를 하는 게 아니란다. 혹여나 내 자식한테 해가 될까 행동도 조심스러워지는 게 부모라고 한다.


엄마도 틀림없이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키웠을 아들이다.


노심초사 키운 아들이 이런 모습으로 본가에 내려와 <살겠다고> 엄마 밥을 얻어먹고 있다.





사진출처:  Unsplash의 minho j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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