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가에 머무르는 동안 낮에 도서관에서 글을 쓰기로 했다.
도서관은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 자리에 있다. 입학하고 2년 만에 바로 위 고등학교로 이사를 하면서 도서관이 되었다. 그러니 딱 꼬꼬마 시절 추억이 있는 곳이다.
비 오는 날 우산이 없어 비를 피하던 처마 끝도 그대로다. 건물 벽에 바짝 붙어 떨어지는 빗물을 발로 차곤 했다. 그러다 보면 친구는 어느새 우산을 들고 온 엄마와 가버리고 나만 남는다.
우리만 아는 지름길이라고 드나들던 개구멍은 산책로가 되었다. 6칸짜리 푸세식 화장실이었던 별동은 창고로 쓰는 모양이다.
괴담이 많던 시절이다. 꼬꼬마 어린이에게 푸세식 화장실은 정말 실감 나는 단골 괴담 장소다.
일단 코를 막아도 소용없는 냄새가 공포다. 파리며 온갖 벌레의 윙윙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다. 내 귀에 들어온 것 같다. 용변 보는 시간이 천년같이 느껴진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누가 끌어당길 것 같아 허공만 주시한다. 몸집이 작아 반마다 푸세식 화장실에 빠지는 애들도 꼭 한 명씩은 있었다. 그러니 괴담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 틀림없다.
이제 화장실이 창고가 되었으니,
밤만 되면 푸세식 화장실에 빠져 죽은 어린이 귀신이 창고에 모여 논다는 괴담이 또 만들어지겠지.
동영상 강의를 듣는 젊은 친구를 보니 반갑다. 모르는 사람이지만 내심 응원한다. 무조건 잘됐으면 좋겠다. 방학을 맞아 부모와 함께 온 아이도 이쁘다. 종이책을 만지는 모습이 제법 귀하다.
사람을 오랜만에 본 것처럼 작은 모습마저 흥미롭고 재미있다. 사람이 아프지 않고 열심히 사는 걸 보는 게 오랜만이라 나도 모르게 넋을 놓는다.
글을 쓰다 자료실을 둘러본다. 서점과는 다른 도서관 특유의 책 냄새가 난다. 뭔가 더 퀴퀴하고 깊은 냄새다.
한때 작가가 발간한 책을 도장 깨기를 하듯 읽었다. 더는 궁금한 작가가 없으면 선반에 꽂힌 책을 순서대로 모조리 읽어버린다. 통로 선반 제일 위 칸부터 벽면 선반 밑 칸까지 6칸짜리 선반 한 열을 읽는다.
공사장 막노동 알바생이 "이 건물 내가 지었잖아." 하는 것처럼,
"이 구역 내가 다 읽었어."라며 혼자 신이 난다.
도서관은 크리스마스 날이나 받던 <종합과자선물세트> 같은 곳이다. 빨간 리본을 풀고 반짝반짝 화려한 비닐포장지를 살살 뜯어낸다.
- 포장지는 엄마가 싱크대에 깔아야 해서 찢어지면 안 된다.-
인기 없는 과자도 잔뜩 섞여 있는 틈에 좋아하는 과자를 찾느라 손이 분주하다.
정신없이 좋아하는 책을 다 읽고 난 후 선반을 순서대로 비워내다 보면 종종 보석 같은 책을 만난다. 과자를 떨이로 넣어 팔던 종합 과자 선물 세트에서 인생 과자를 만나듯.
그런 도서관을 참 오랜만에 들렀다.
본가에서 좋은 기억을 쌓으려 무던히 노력 중이다.
평소 새벽 5시부터 두 시간씩 운동한다. 주 4일 이상을 한다. 토요일은 절대 빠지지 않는다. 불금을 보낸 사람들 덕에 토요일 새벽 시간은 내 전용 헬스장이 된다.
추우나 더우나 새벽에 운동하려고 일어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놈의 악마와 천사가 하루도 빠짐없이 싸워댄다.
"가지 마, 하기 싫을 때 가봤자 운동을 제대로 못 해."
"일단 가. 가면 또 달라져. 해봐서 알잖아."
일단 간다. 운동 후 샤워를 하면 개운함이 배가된다. 일부러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게 몸을 혹사한다. 샤워할 때마다 흐뭇하다.
'봐. 갔다 오면 이렇게 좋잖아?‘
좋은 기억을 먼저 떠올려 행동하는 습관을 들인 지 5년째다.
본가에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정한 날짜보다 1주일을 더 버티다 내려왔다. 여행 기분을 내면 좋아질까 싶어 버스가 아닌 KTX를 타봤다.
다를 바 없었다.
좋은 기억을 만들어 보자. 새벽 운동 갈 때처럼 좋은 생각을 더 많이 해보자.
내일 또 도서관에 와 건물을 돌아보고 책을 골라봐야지.
글을 쓰다 보면 오늘처럼 좋겠지.
그럼 언젠간 본가에 올 때마다 이곳에서 글을 쓸 생각에 신날지도 모른다.
너무 신났으면 좋겠다. 막 신나겠지.
사진출처: 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