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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무드 Jul 30. 2023

Ep.4 바퀴벌레는 매일 나왔지만, 넓은 집은 좋아




가족이 된 그날들은 낯설고 싫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 건지 몰랐다. 가족이 되었지만 겉모습만 가족일 뿐, 진짜 가족은 되지 못했다. 우리는 모두가 치열하게 싸우고 긴장하고, 미워하고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었다.





계부 즉 나의 새아빠와 엄마는 동갑이었고 그들이 만난 나이는 서른네 살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24살에 아이를 낳아 키우던 두 남녀가 각자의 아픈 사연으로 만났겠지만, 아팠던 시간을 보듬어 줄 배우자 혹은 동반자 또는 아이의 부재를 채워줄 양육자가 필요했던 것 같다. 아픔의 이유는 달랐지만 두 사람은 그렇게 의지를 하고 가족이 되기로 결심한다. 이들의 마음을 느낌적으로 알던 8살의 나, 7살, 6살의 동생들은 어느 날 아저씨와 엄마에게, 아줌마와 아빠에게 말한다.



“이제 아빠라고 부르면 돼요?”

“이제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


하고 말이다.



투병으로 전 아내와 사별을 하고, 두 아이를 혼자 키우며 이 일, 저 일 전전긍긍하며 살고 있던 서른넷의 아빠, 자신의 청춘을 다 앗아가 버린 사람을 만나 증오로 살고 있던 서른넷의 엄마, 너무 어린 나이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친엄마와 이별을 하게 된 두 아이들. 친부에 대한 기억이 유기라고 경험하게 된 나. 그리고 우리를 더욱 끈끈한 가족으로 만들어 준 동생.



우리는 이렇게 가족이 되었다.


처음으로 아빠를 아빠라고 부를 수 있어서 행복했다. 엄마가 웃는다.



여섯식구가 가게 된 첫 보금자리는 정말이지 매일 바퀴벌레가 나왔던 집이다. 근데 그 집이 참 좋았다. 그 당시 드라마 부잣집에서 나오는 집의 구조여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나는 그 집이 좋았다. 집이 주는 안정감 따뜻함이 있었고, 조금 덜 불안했다.



위생때문에도, 시장통 안에 집이 있는것도, 이건 좀 아니다 싶었는지 우리는 길게 살지 않고 이사를 또 갔다. 그 집에서 떠나 좀 더 집 다운 집. 넓은 집으로 이사 갔다. 지하에 살고 있던 3남매가 살고 있는 3층짜리 빌라였다. 우리 빌라는 어떤 이름이었으면 좋겠냐고 환하게 웃어주시던 군포시 당동 장미 빌라 301호. 빌라 이름은 원래 없었는데 입구에 장미 덩굴이 예뻐서 우리들이 지어드렸다. 여름엔 옥상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었고, 옥상 입구엔 주인집 아들이 필름을 현상하는 암실이 있었다. 비가 오는 날에는 비 맞으러 놀러 나가기도 했고, 모기차 소리가 날 때면 지하에 살고 있던 3남매와 같이 모기차를 따라가기도 했다. 봄이면 놀이터에서 탈출 놀이부터 한 발 뛰기, 앞동산 오르기. 자전거 타고 동네 돌아다니기, 근처에는 새아빠의 형. 그러니까 나에게 새 큰아빠네 가족도 살고 있었는데, 큰엄마는 가끔 우리의 간식이나 끼니를 챙겨주셨다. 손재주가 좋으신 큰엄마는 아이들의 집도 만들어 주셨고, 우리는 큰엄마네 어린 아들 둘과도 잘 지냈다. 여름엔 물총놀이도 하고 놀이터에 네잎클로버 찾기 놀이도 했는데, 큰엄마가 그때해 주신 나폴레옹 얘기가 아직도 기억난다.



엄마 아빠가 가족을 만들어주면서, 우리는 안정을 찾는 것 같았다. 너네 엄마 너네 아빠가 아닌 우리 큰아빠, 우리 이모부가 아닌 그냥 큰아빠, 그냥 이모부가 되기 시작했고 우리 6식구를 넘어 친척들과도 놀러 다녔다. 슈퍼를 하던 이모부네 차는 초록색 봉고차였는데, 그 차에 우리 삼 남매, 이모부와 사촌동생 두 명, 그리고 큰엄마네까지도 같이 한강에 놀러 갔다. 어떤 날엔 이모부가 방송국으로 데려갔는데, 촬영장을 보여주겠다며 무작정 데려갔다가 방송국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무척 아쉬워하던 날도 떠오른다. 그래도 재밌었다. 그냥 즐거웠다.



초등학교 내내 나는 1년마다 전학을 다녔는데, 그래서인지 제대로 된 교우관계를 맺지 못했다. 그랬던 내게 친구들 동생들이 많아진 건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그렇게 매일 재밌는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엄마가 동생을 낳으러 간다고 한다. 설레면서 좋았지만, 불현듯 어렸을 때 배를 움켜쥐고 울부짖던 아줌마가 생각나서 너무 초조했다. 엄마가 아프지 않았으면 했다. 제왕절개로 나를 낳은 엄마는 동생도 수술로 낳았다. 그날 나는 동생들을 데리고 DIY 삔을 직접 만들 수 있는 팬시점에 가서 직접 고른 자재로 엄마한테 줄 삔을 만들어 병원으로 향했다. 엄마가 환자복을 입고 누워있어서 살짝 겁이 났지만 엄마가 괜찮다며 이리 오라고 한다. 그렇게 나는 친동생이 생겼다!



팔 다리 길고 못생겼지만, 귀여운 동생! 안녕! 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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