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무드 Jul 30. 2023

Ep.3 비오는 날엔 나를 데리러 와줘요.

나도 엄마가 엄마 같았으면 좋았을껄..



초등학교 2학년 어느 날. 비가 오는 날이었다. 친구들은 각자 예쁜 우비, 장화를 신고 집으로 가거나 엄마들이 데리러 왔다. 입구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뛰어갈까. 비가 그친 후 갈까. 가방을 쓰고 뛰어갈까. 여러 번 고민하다가 그냥 적당히 빠른 걸음으로 빗속을 걸었다. 엄마는 밤 9시나 10시쯤 퇴근을 하는데, 집 근처에 둘째 이모가 슈퍼를 하고 있어서 나는 늘 이모 슈퍼로 하교했다. 이모네 슈퍼에 도착하면, 슈퍼 뒤쪽 작은 쪽방에서 숙제를 하고 가로, 세로 20cm 남짓한 작은 TV를 봤다.


이모부는 두부를 엄청 좋아하는데, 절약이 몸에 밴 이모는 슈퍼에서 팔고 남은 두부를 늘 집으로 가져가서 두부조림을 해왔다. 날씨가 더워서 살짝 쉬어가는 날에는 두부에서는 쉰내가 나는 날도 있었다. 숙제를 하고 나면 밥을 먹고, 슈퍼에 팔고 있는 불량식품을 먹고 싶었는데 이모가 그건 몸에 안 좋다며 못 먹게 했다. 그게 어찌나 서럽던지.






이모부는 늘 2-3시쯤 자전거를 타고, 집에 갔다. 사촌동생 둘이 있는데 공부를 시켜주러 집에 가는 거였다. 몇 개월 차이 나지 않는 사촌 동생과, 그 동생의 남동생의 공부가 마칠 시간이 되면, 다시 슈퍼로 돌아와 마감 준비를 하셨다. 사실 나는 그런 아빠가 있는 사촌 동생이 늘 부러웠다. 이모부가 가시고 나면 나는 이모랑 카운터에 앉아 공부를 하거나 TV를 보다가 잠에 들 때쯤 엄마가 왔다. 엄마랑 어두운 가로등 불빛 아래를 조금 걸어가다 보면, 엄마랑 나랑 사는 반지하 집으로 들어간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콘크리트 바닥에 수도꼭지 하나와 세탁기가 있고, 나는 거기서 신발을 신고 씻고 들어가 엄마랑 잠에 든다. 잠에 들기 전 엄마가 한 날은 삐삐를 꺼낸다. 보험회사를 다녔던 엄마는 회사에서 받았다고 자랑했고, 나는 엄마가 일을 잘해서 받은거냐며 물으며, 그냥 마냥 신이났다. 그 삐삐를 받았다는 소식에 신나 일기를 썼던 날이 기억난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살던 집을 떠나 그토록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하던 엄마랑 사는 건 너무 좋았다. 하지만 엄마랑 산다고 해도 엄마를 자주 볼 수 없어서 슬펐다. 엄마가 이혼을 했다는 사실도 몰랐을뿐더러 그냥 엄마랑 있어서 너무 좋았지만, 왠지 엄마랑 이렇게 지내다가 할머니네를 가야 하는 건지, 아니면 엄마랑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친구들은 다 집으로 가는 거 같은데, 나는 왜 이모 슈퍼로 가야 하는지. 잘 몰랐다.


초등학교 2학년이면 또래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서, 인형놀이도 하고 그랬을 나이였을 텐데. 나는 그때 친구가 없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할머니 집에서 살 때는 학교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진아라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를 빨리 또 만나고 싶어서 숙제를 5분 만에 했었는데. 엄마랑 같이 사니 친구가 없다.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커서 알았는데, 친구들의 숙제나 알림장은 엄마가 봐준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학교 끝나고 집에 가면 친구들 엄마가 간식을 준비해 준다는 것도 조금 커서 알았다. 1990년생인 나는, 아니 그 당시에는 아무래도 맞벌이 부부들이 꽤 많았기에. 그런 부모의 챙김 이런 게 엄청나게 중요한 시기는 아니었다. 대신 나는 일찍 혼자 잘하는 아이가 되었다.​


그렇게 엄마랑 그 집에서 지낸지 얼마나 지났을까.


엄마가 어느 날 밤에 없어졌다. 같이 자고 있었는데,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안 그래도 어두운 동네였는데, 밤에 눈을 뜨고 엄마를 찾았는데 엄마가 없었다. 펑펑 울고 있었는데, 엄마가 들어왔다. 진짜 너무 무서웠는데, 엄마한테 떼도 안 썼다. 엄마에겐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던 거 같다. 어느 날 엄마는 어떤 아저씨를 소개해 줬는데, 나랑 비슷한 또래에 아이 두 명도 같이 왔다. 놀이방이 있는 식당에서 처음 만났다. 지금의 아빠와 동생들을. 또래여서 그랬는지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하굣길에 이모네 슈퍼를 가지 않고, 그 아이들이 살고 있던 집으로 갔다. 첫째는 나보다 1살 어린 남자아이였고, 둘째는 나보다 2살 어린 여자애였다. 아무래도 또래의 아이이다 보니 금방 금방 친해졌다.​



"언니! 나 아는 언니네 가서 비디오 볼래?"

"그래"​



지금 아빠는 아내와 사별을 겪었고, 엄마는 이혼을 겪었고, 서로 아픔을 알아주고 보듬어주다 우리는 이렇게 가족이 되었다.


그리고 9살 어린 동생도 생겼다. 너무 행복했다. 무서운 지하실 집을 떠나 우리는 우리 6식구가 살 집을 구해 안산을 떠나 시흥으로 이사 갔다.


무슨 시장 안에 있는 집인데, 엄청 넓은 집에 방이 5개나 되었지만, 방 2개는 문이 열리지 않았다. 이상한 구조였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하지만, 그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9살의 나, 8살의 남동생, 7살의 여동생 연년생의 친남매들도 치고 박고 엄청 싸운다지만, 우리는 싸움의 정도가 달랐다. 2:1로 편가르기는 기본이고, 너네 엄마. 너네 아빠라며 치사하고 치졸하게 싸움은 물론, 우리 아빠야! 우리 엄마야!로 시작해서 엄마, 아빠가 일하러 나가거나 집에 없을 때에는 늘 전쟁터였다. 엄마가 재혼을 결정하면서 할머니와 이모가 엄청 반대한 걸 안다. 이런 이유였을까. 어린아이들이 상처받는다는 거. 엄마가 힘들어질 거라는 거. 남자와 여자가 만나 다시 가정을 합치는 것보다 애 딸린 남녀가 만나면 안 된다는 옛 어른들의 말들이 이런 거였을까. 우리는 정말 치열하게 싸웠다.

아빠는 늘 내게 누나로서 언니로써 포용하길 바랐고, 엄마에겐 무조건적인 사랑을 바랐다.


양육에서 아빠는 늘 한 발자국 뒤에 빠져있었으며, 방관했다.(그래서 우리는 아동심리센터도 몇 번 다녔다. 추후 다른편의 얘기에서 얘기해보려고 한다.)​


갈빗집에서 처음 만난 날 싫다고 울고불고 엄마 데리고 나올 걸 그랬나. 그랬다면 어땠을까. 나는 엄마를 또 밤 늦게까지 기다렸어야 했겠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쟤네랑 살기 싫다고 했었어야 했을까. 시장통 골목에 있던 집이어서 그랬는지, 집은 넓었지만 밤에는 쥐가 천정 위를 뛰어다니고 식탁에 케이크를 놓고 나간 날이면 바퀴벌레들이 지나간 흔적들이 나를 더 힘들게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Ep.2 처음 먹어본 롯데리아 햄버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