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무드 Jul 27. 2023

Ep.2 처음 먹어본 롯데리아 햄버거

유기를 경험한 나는 또 한번 이별을 경험한다.






할아버지의 사고


유기를 경험한 나는 또 한번 이별을 경험한다.

나를 안정적으로 키워주신 조부모와 헤어짐을 겪게 된다.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나무. 할아버지가 큰 사고를 겪으시게 되었다. 매일 이모를 출퇴근 시켜주던 할아버지는 그 날도 여전히 아침 일찍 나섰다. 엄마가 휴무날이었는지, 나랑 같이 자고 있었고, 엄마는 할아버지가 나간지 얼마 되지 않아 전화를 받는다. 엄마 표정이 좋지않다.


할아버지 사고를 알리는 누군가의 전화였다.

읍내로 나가는 삼거리에서 신호위반을 한 버스와의 충돌. 할아버지와 이모가 타고 있던 오토바이의 사고. 뒤에 타고 있던 이모는 옆 인도 쪽으로 튕겨져 나가 타박상정도로 끝났었지만, 할아버지는 버스 밑에 깔려 왼쪽다리를 절단해야 할 수도 있다는 청전벽력같은 소리가 들렸다. 시골에서 가장 크다는 종합병원. 나는 오열하는 할머니와 잿빛의 얼굴을 한 엄마 옆에서 앉아 할아버지를 기다렸다. 아마 사고현장에서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구급차보다 가족들이 먼저 병원에 도착했었던거 같다.


병원 문이 열리고 할아버지 목소리가 들렸다.

"으으윽 아파.. 아파.. 으으윽.. 으으........"

너무 무서웠다. 할아버지 얼굴은 보이지 않고 누워있는 형상으로 할아버지임을 알았다.

배드는 여러명의 의사옷을 입은 사람들과 간호사들이 끌고 응급실로 들어갔고, 할머니는 주저 앉아 오열했다.


"낭미 아부지.. 낭미 아부지!!!!!"

할머니의 오열 소리다.


할아버지가 누워 있던 배드가 지나간 자리엔 핏자국이 떨어져있다.

한참을 멍하니 핏자국을 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오래 수술을 했다. 아주 오래.















처음 먹어 본 롯데리아 햄버거


타지에서 일하는 엄마는 나와 일주일에 한번. 혹은 2주에 한번 볼 수 있었다. 엄마를 대신해 나와 유대관계가 좋은 이모다. 엄마의 셋째 동생.

할아버지의 수술은 계속 되었고, 사고가 난 다음날도 나는 할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할머니도.

이모가 입원한 병실에 갔다. 내 손에 쥐어 준 5천원을 들고 병원 앞 롯데리아에 가서 햄버거 세트를 사오라고 한다.


병실 침대 옆 간이 침대에서 햄버거를 먹었다. 그때 먹은 롯데리아 햄버거 맛이 아직도 기억난다.

맛있었지만, 맛이 없었다. 처음 먹어본 햄버거지만 신나지 않았다. 맛있냐고 물어보는 이모에게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많이 놀랐을 나를 안심시키려고 했었지만,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하기엔 많이 어렸다.


시간이 좀 지난 후 할아버지를 병원에서 만났다. 할아버지는 수술 후 집에 오지 못하고, 할머니와 어린 삼촌, 퇴원한 이모가 집 정리를 하러왔다. 냉골의 거실, 차디 찬 콘크리트 바닥에 얇은 장판. 할아버지 할머니가 키우던 개가 새끼를 낳았고, 강아지들도 어디론가 다 보내버렸다. 식당을 운영하시던 할머니 집엔 엄청 큰 밥솥이 있었는데, 밥솥 가득 밥을 지었고 조금씩 퍼서 냉동실에 얼렸다. 병원에 가져가야 한다면서 말이다. 나는 엄마가 살고 있던 집과 할아버지 병원, 그리고 한번 씩 할머니가 집에 올때면 살림살이들을 챙겨 병원으로 다시 향했다. 그렇게 몇 일이 지났을까. 오늘은 할아버지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신나게 방방뛰며 엄마와 할머니를 따라갔다. 소독약 알콜 냄새와 비릿한 냄새들. 숨을 쉬고 있지만 답답한 공기. 병원 천정으로 왔다갔다 지나다니는 병원 서류들을 나르는 기계. 많은 사람들.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 눈이 부실정도로 환한 병원 복도를 지나고 또 지나 마침내 할아버지가 있는 병실로 들어선다.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쾌쾌한 냄새도 났다. 병실 침대 옆. 간이 침대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돗자리가 펴있거나 얇은 이불들이 깔려있다. 단국대학교 정형외과 병동. 장기 입원 환자들이 입원해 있고, 짧게는 1년, 길게는 5년 이상 입원해있는 거대한 병원이었다. 이런 상황이라는 걸 알리 없는 어린 나는 많게만 느껴지는 사람들 사이에서 할아버지를 찾는다.


누워계신 할아버지를 발견했다. 할아버지의 한쪽 무릎엔 커다란 쇳덩이 링과 나사들이 살을 뚫고 들어가 있었다.

지금 할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봤다면, 왜 이런 시련을 주는거냐고. 왜 하필 내 가족이냐고. 내 인생의 전부 우리 할아버지냐고 목놓아 울었겠지만, 그때의 나는 사실 어떤 기분이었을까. 모든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아서 다행이었을까.


확실히 기억나는건 그 환하던 할아버지의 미소를 몇년간 볼 수 없었던 것은 기억난다.

인생의 10년도 살아보지 못한 내게 슬픔은 연속이었다. 9살의 나.


“주희는 이제 엄마랑 살아야 돼.”

한편으로는 좋았지만 한편으로 가슴을 도려낸 듯 마음이 이상했다. 아픈 정도가 아니라 송곳으로 가슴 표피 어딘가를 누가 계속 찌르는 것 같았다. 매일밤 울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도 나의 나무들은 없었고, 유년시절 나를 안아 준 할아버지가 만든 집에서도 떠났다. 주교리마을 큰 소방서 코너 돌아 나오는 첫번째 그 집. 안녕.


할아버지가 걷게 되시는 날 다시 올게. 안녕.







* 솔직하게 털어놓고 적고 공개할 수 있었던 용기였는지, 할아버지가 준 선물인지 모르겠지만, 브런치스토리 작가가 되었어요. 앞으로 저의 이야기를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글로성장연구소 #별별챌린지 #별별챌린지3기  #최리나작가 #김필영작가 #필명 #주무드 #필명을쓸수있던날 #브런치작가가된날


매거진의 이전글 Ep.1 편도체 속 나의 유년시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