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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무드 Jul 27. 2023

Ep.1 편도체 속 나의 유년시절

나의 출생기, 유년 시절은 유기로 시작된다.




나의 출생기, 유년 시절은 유기로 시작된다. 밝고 아름답고 경이롭고 신비해야 할 한 아이의 탄생이 누구에겐 달갑지 않은 그런 일이었나 보다. 1990년 어느 봄날. 경기도에서 태어났다. 2.4kg의 작은 아이. 그때 엄마 옆에는 할머니가 있었다고 한다. 할머니 표현으로는 엄마가 여러 번 까무러쳤고, 간호사실과 병실을 오가며 우리 딸 죽는다고 소리쳤다고 한다. 나는 태어나서 100일도 채 되지 않은 채, 할머니 할아버지 품에 떨어졌다.

그래서 그런가 유독 나는 엄마 냄새를 모른다. 할머니 냄새, 할아버지 냄새는 기억이 나는데 엄마 냄새는 잘 모르겠다.


나는 기가 막히도록 유년 시절의 기억이 너무 생생하게 난다. 아직 엄마에게 말해본 적은 없지만, 어렴풋이 나는 그 나이가 기억이 난다고 하면, 엄마는 많이 놀라는 눈치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나의 유년 시절의 장면들이 있다. 아직도 기억나는 걸 보면, 왜 꼭 그 기억만 나는 건지 야속하다.



⦁ 기저귀를 하고 있는 나는 상아색과 벚꽃잎 한 방울씩 머금은 벽지와 장판 그리고 햇살이 살짝이 들어오는 따뜻한 집 안에서 볼펜 하나를 가지고 놀고 있다. 엄마와 할머니는 방문을 살짝 열어둔 채, 나를 힐긋힐긋 확인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혼을 준비하는 엄마와 할머니의 대화였던 것 같다. 그 어린 내가 무거운 분위기는 감지했을 테니. 그래서 마구 울면서 그 볼펜을 방문에 던졌던 기억도 생생하다.


⦁ 엄마는 늘 웃지 않았다. 그냥 엄마로서 나를 죽지 않을 만큼만, 혹은 본인이 죽지 않을 만큼 정도의 벼랑 끝에서 최선을 다해 보살펴줬던 것 같다. 이게 아마 세 돌 즈음 나의 기억이다.


⦁ 5살인가, 6살 때였다. 유치원을 다니기 전이었으니, 15층 정도의 아파트 정문 앞이다. 엄마가 내게 말한다. “주희야, 아빠한테 가고 싶어? 아빠랑 살래?”라고 물었다. 뭐라고 대답한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엄마 차에서 내려 스케치북을 들고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엘리베이터로 뛰어갔다. 뒤돌아보고 엄마를 찾으니 엄마 차와 엄마는 없었고, 나는 그날부터 친부와 살게 되었다. 하룻밤, 이틀 밤, 삼일 밤,,, 열 밤 정도 잔거 같은데, 할머니랑 할아버지, 엄마, 이모, 삼촌이 보이지 않는다. 무서웠다. 이게 이별인가? 처음 알게 된 것 같다.


⦁ 친부는 덩치가 엄청 컸다. 연예인으로 치면, 강호동 선수 시절의 체구랄까. 친부는 웃통을 벗고 있었고, 옆에 엄마랑 비슷한 체격의 여자가 누워있다. 친부는 내게 그 여자한테 이제 엄마라고 부르란다.


⦁ 그 여자는 며칠 뒤 침대에서 시계랑 뒹굴뒹굴하며 배를 붙들고 고통을 호소한다. 나는 작은방과 그 아줌마가 있는 방을 뛰어다니면서 “아빠! 아줌마 아파해요!! 병원 가야 될 거 같아요! 119 불러요!”


⦁ 며칠 뒤 산부인과 병원이었는지, 갓난 아기와 그 여자가 누워있다. 다른 가족들은 서서 구경을 했다.


⦁ 나는 며칠간 친부의 모, 할머니와 며칠 지냈다. 친부의 집, 즉 우리 엄마와 살던 집은 친부 그의 허세들로 뻔쩍뻔쩍 한 집 구조였다. 1990년대에 지금 2023년의 아파트 인테리어, 그리고 식인 물고기 어항에 엄청 비싸 보이는 검정 소파, 그리고 골프채, 문 열릴 때마다 삐리리 거리는 도어록까지 있었던걸 보면 빚이었는지, 엄마의 돈으로 처바른 그의 사치였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문이 열리지 않자 할머니는 친부에게 전화했고, 나는 그날 어린이집을 가지 못했던 것 같다.


⦁ 그리고 며칠이 흘렀을까. 친부와 그 여자는 소파 앞에 서서는 할머니에게 말한다. “주희 고아원에 보낼까 해요.” 이 소리를 들은 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그날 밤이었는지, 새벽이었는지, 아니면 이른 아침이었는지 아무도 깨지 않은 정적이 깃든 거실에서 나는 외할머니네 번호를 기억해 전화기 다이얼을 눌렀다. ‘0458.332.4410 이쯤 되면 대단한 기억력이다. 30년 전 할머니 집 번호를 기억하고 있다는 내 기억력이.

오죽하면 그랬을까 가엽기도 하다. 전화를 걸어 할머니한테 울며 말한다. 할머니 나 데리러 와 아빠가 나 고아원 보낸데.. 지금 빨리 와줘. 무서워.


⦁ 내 기억엔 그날 저녁 나를 데리러 엄마랑 이모가 왔던 것 같은데, 아니라고 한다. 내 왜곡된 기억은 이제부터 시작된다.








친부는 운동선수라고 속이고 엄마랑 결혼했다고 한다. 알고 보니 성남과 경기도 일대에서 소위 양아치 짓을 하는 조폭, 일수 받는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룸살롱에서 며칠 지냈다. 친부는 고아원에 보내려 하다가 나를 그곳에 방치한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담배 피우는 화장 진한 이모들이랑 며칠을 지냈다. 6-7명의 이모들이랑 쪽방에서 같이 잠도 잤는데, 6일을 있었던 건지. 2-3일 있었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겠지. 엄마는 친부에게 날 보냈고, 친부는 나를 고아원에 보내려다. 결국 난 룸살롱에 유기됐다. 여기까지가 나의 유년 시절이다.


유기되었던 나는 다시 엄마 품으로 돌아왔고,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는 몇 년 후 할머니에게 듣고 알게 되었는데, 룸살롱에 마담이 수소문해서 엄마한테 연락하게 되었고, 마담이었던 그 여자. “주희 여기 있어. 너무 안쓰러워서 내가 못 살겠어. 와서 좀 데려가. 주희 엄마.”라고 했단다. 그 후로 나는 외할머니 집에서 자랐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였을까. 너무 가엽잖아. 너무 가여운 유년을 보냈잖아 나.

누굴 원망해야 하는 거야. 꼭 누굴 미치도록 원망해야 하는 줄만 알고 누구를 미워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나는 그렇게 자랐다.



이하 더 기억나는 건,

엄마의 자살시도. 빨간 매니큐어 뚜껑을 빨리 열어 쏟으며 나를 안심시켰지만 식탁에서 쓰러져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갔던 엄마. 웃지 않던 엄마, 내 옆에서 잠만 자던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서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엄마를 매번 기다렸던 나.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까워서 피곤에 지쳐 쓰러져 자는 엄마 옆에서 할머니 요강에 소변을 누면서도 엄마를 보고 싶어 했던 나. 한 날은 할머니 요강에 대변을 눈 적이 있는데, 왜 화장실에 가지 않았냐고 혼이 났던 그날도 난 엄마를 기다렸다. 유치원에서 배워 온 방귀소리가 큰 새색시 동화 내용을 들려주며, 환하게 웃는 엄마를 보고 싶어 했다.


이게 내 기억 속 나의 유년 시절이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환경이 참 중요하다고 한다. 환경론을 반박하고 싶지만, 아무튼 겪지 않아도 될 경험들을 차곡차곡 쌓아오면서 자란 나는 몇몇의 친구들에게 몇몇의 사람들에게 나 너무 슬펐다고 말했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말한다. 잘 자랐다고 바르게 컸다고. 한편으로 나도 내가 대견하지만 그런 말들을 계속 듣고 있으면 반발심이 생긴다. 모가 나고. 가시가 돋는다. 선인장처럼 가시를 보이며 지내고, 개복치처럼 한껏 부풀어 오르고, 그래서 나는 내 아이에게 부모가 부모다운 모습을 보여야 된다는 강박이 있다. 매우 유독 강하다.


내 아이의 유년 시절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고, 좋았고 행복하고 따뜻한 기억만 남겨주고 싶다.

사람의 뇌에는 편도체라는 곳이 있다. 이것은 감정과 공포를 담당하는데, 어떤 특정한 상황 혹은 사물을 보고 좋지 않은 기분을 들게 한다고 한다.

하지만 나의 편도체는 이 모든 걸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 지날 날들을 잊어야 자아성찰이 가능할 것 같아 무거운 글을 썼어요. 나를 불쌍하다 여기지 말아 주세요. 언젠간 이 지난날의 기억이 나를 안아줄 거라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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