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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무드 Jul 27. 2023

사무치는 나의 나무에게.

안녕. 나의 나무.






할아버지, 봄 냄새가 제법 나.


할아버지한테 쓰는 편지는 제법 자주였는데, 너무 오랜만에 쓰네요. 매년 새해. 어버이날, 생신, 보고 싶을 때마다 썼던 편지를 이상하게 한 번도 안 썼다니.


할아버지. 2023년이에요. 할아버지가 떠난 지 9년이나 흘렀네요. 지금 여긴 준비되지 않은 여름 공기랑 봄바람과 황사 바람이 불어. 바람을 맞으니 재채기가 늘었어. 이 맘 때쯤이면 늘 감기를 달고 살았었는데, 예전보단 심하지 않아요. 할아버지랑 같이 있으면 항상 내가 감기 걸린다고 호들갑 떨던 때가 생각나. 왜 어렸을 땐 할아버지 나 할머니 셋이 나 꽁꽁 싸매서 매 계절마다 오토바이 타고 소아과 갔었잖아! 그게 맘에 걸려서 내게 더 좋은 환경을 준 건가 생각이 드네요. 할아버지가 떠난 이후로 큰 감기로 앓은 적은 없어. 아 여기는 코로나라는 이상한 바이러스가 생겼는데, 그거는 한 번 걸렸다. 할아버지가 걸려본 적 없는 거라 막아줄 수가 없었나?


어쨌든 올해 봄볕은 유독 햇빛이 강해. 나는 할아버지가 이야기했던 대로 정말 잘하고 있어. 힘들 때 주저앉을 때 혼자인 거 같을 때 문제점이 생길 때. 할아버지의 말을 생각하거든. ‘잘해.’라는 말. 기특하지.





아침에 공복으로 등교할까. 새벽같이 일어나 운동하고 오셔가지고, 따뜻한 밥 지어 옥수수 마가린에 간장이랑 계란 후라이 넣고 꼭 한 수저 잡수신 다음에. 주시던 아침밥이 요즘 왜 그리 생각나는지 모르겠어. 내가 요즘 그 맛있는 아침밥을 할아버지 증손자한테 해주고 있잖아! 이 맛은 꼭 알려주고 싶더라고.


아직도 기억해. 코 끝에 안산천에 차가운 하천 냄새가 스칠 때면 곧 단풍이 순식간에 노을에 빛을 다 훔친 거처럼 절경일 때가 오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적이 왔으면 하는 마음에 ‘할아버지 얼른 일어나서 단풍놀이 가자!’ 했더니 ‘주희야. 할아버지는 못 갈 거 같아.’ 하면서... 결국 보지 못하고 떠난 할아버지라 그 말이 어찌나 원망스럽던지.







그래도 할아버지 보내는 3일과 그 달은 정말 세상에서 제일 예쁜 단풍길을 보았어. 아직도 잊히지가 않네. 그 풍경을 다시 본 적도 없는 거 같아. 할아버지가 우리 가족에게 준 최고의 가을이 아니었나 싶어. 할아버지! 지금 난 대구에 있어. 내려온 지 4-5년 정도 되어가고 있는데. 제법 익숙해진 것들도 있지만 여전히 새로워. 익숙한 것들 사이에 끼어든 새로운 것들도 낯설고. 할아버지가 없다는 것이 문득 낯설어지는 것처럼.

 

가만히 있어도 시간이 흐른다는 건 그런 것 같아. 날 구성한 것들이 모두 닳아 없어지고 나면 할아버지가 날 알아볼 수 있을까 어리광 담은 걱정도 해. 목 아래서 들리는 비명은 누구의 목소리일까 괴로워하던 밤도 많이 지나갔어. 내일이 오는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고 울던 어두운 아침도 많이 옅어졌어.


가끔 할아버지의 낡은 지갑과 할아버지 사진을 찾아보곤 해. 어렸을 때 일기장도 꺼네보고, 그 시절로 돌아가면 할아버지랑 할머니랑 함께 했던 시간으로 돌아가거든. 축축하게 물들어 있는 것들. 모든 일기가 세월에 부르터서는 모퉁이가 둥그렇게 낡아있더라.


할아버지가 꿈에 나오거나 사무칠 때는 유일하게 S랑 할아버지 얘기를 나눠. S도 할아버지가 생각날 때면 꺼내보는 것들이 있대. 둘이 전화로 할아버지가 해준 밀가루 튀김 과자, 돈까스, 함박스테끼, 미국식 감자튀김, 옥상 고무다라 풀장, 할아버지가 잡아 준 매미, 할아버지를 잘 따랐던 샘과 파피. 할아버지가 영어를 잘하는 이유. 할아버지의 미군부대 얘기 이런 것들을 얘기해. 서로 훌쩍대다가 웃다가 하면서 말야.

 

S는 사진이 바래는 것을 매일, 매달, 매년 확인하면서 시간이 지남을 느끼고 있다고 했어. 사진이 그렇게 빨리 바래는지는 처음 알았대. 그것들이 달갑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만큼 우리가 괜찮아졌고, 괜찮아지고 있음의 증명이라고 하면 그것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고 해.

 

그리움의 크기는 시간에 비례하진 않는 거 같아. 곳곳에 복병처럼 숨은 것들이 가끔 우리를 넘어뜨릴 것 같다는 건 이미 알고 있어. 잃어본 것들이 있다는 건 그래서 서글픈 것 같아. 무언가의 예행연습이 된다는 것은 달갑지 않은 일이란 걸 우리 모두가 알고 있잖아. 지금 내가 잘 못하고 있는 것들이 좀 있어. 하부지.. 할아버지의 거두절미 한 ‘잘해.’ 한마디를 다시 새기고 정말 잘해볼게! 할아버지가 걱정하던 엄마랑의 앙금들은 많이 풀렸어! 할아버지가 나한테 지혜를 주시고 가신 것 같아. 매번 할아버지가 선물하고 가신 계절이 오면 나는 또다시 편지지를 꺼내겠지만. 그래도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괜찮아져 있겠지.


할아버지를 보냈던 가을은 이젠 슬프지만은 않아. 할아버지가 있는 동산에 가면 그동안의 할아버지 이야기도 들려줘.

아 참! 할아버지! 나 글 잘 쓰는 거 할아버지가 여기저기 자랑해 줬잖아. 나 어제 상 받았어! 잘했지. 할아버지 나 자랑하는 거 좋아했잖아. 나 자랑 많이 해줘 거기서.


봄의 시작에서, 할아버지의 지지 않는 추억이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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