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된 구축아파트 난제
아이 하원 후 집에 오는 길이였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15층 사는 아저씨와 16층 사는 아주머니 두 분과 나와 아이 넷이 탔다. 15층, 16층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제법 친해 보인다. 안부를 주고받는 이야기에 내 귀는 그들의 대화에 집중되었다.
“집에 습도 안 높아요?”
“저희 집은 늘 높아요..”
“저희 집 안방에는 장롱 있는 벽 구석마다 곰팡이가 폈어요. 베란다 창고에도 피더라고요. 우리 집만 그런가 싶었지. “
“저희도 그래요.”
오 마이갓. 곰팡이? 엘리베이터는 우리 층에 도착했고, 간단한 인사를 한 후 재빠르게 도어록을 눌러 집 안으로 들어와 안방으로 향했다. 프로비염러인 나는 냄새를 잘 못 맡는다. 커튼을 치우니 재채기 연발이다. 아저씨가 말한 장롱 구석을 확인했다. 천장 쪽 벽지에 검은 녀석이 보인다. 오. 마. 이. 갓! 얼마 전부터 잠을 잘 때면 재채기가 엄청 나온다 싶었었다. 여름 같은 봄 날씨에 송홧가루에 미세먼지들인가 싶었다. 원인이 여기 있었구나
아이를 다른 방에 유인시킨 후 미디어를 틀어주고 절대 이 방에 오지 말라고 한 후 곰팡이 박멸 작전에 나섰다. 전에 살던 집도 20년 된 구축아파트였는데, 외벽에 금이 가서 집 내부 천장에 곰팡이와 누수가 흘러 대공사 수리를 한 적이 있어서 이번 집도 그런 현상인 줄 알고 관리실에 전화를 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한 후 관리실에서 돌아온 대답은 “다른 집도 다 그럽니다. 외벽 문제면 누수가 있을 겁니다. 20년 된 구축이고 곰팡이 문제라면 저희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사모님 댁 말고도 이런 전화 많이들 하십니다. 저희는 해드릴 게 없습니다.” 우리 집과 같은 집이 많다니 우리 집은 1-2라인 아파트로 장롱 뒤 벽은 바로 외벽과 맞닿는 끝집이다. 정남향 집이라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한샘 장롱은 쓰는 게 아니라더니 한샘가구 탓인 줄 알았다.
한샘 탓해봐야 어쩌겠는가. 부주의한 내 잘못이지. 건조한 겨울철 가습기를 돌리고 환기도 매일 했고 장롱문도 매일 열어놓고 출근했었다. 리모델링할 때 단열시공까지 완벽히 했던 벽면이다.
하지만 문제는 공간을 두지 않고 딱 붙여서 설치한 장롱. 그리고 빼곡히 꽉꽉 옷들로 채운 터질듯한 장롱관리가 원인인 듯했다. 부주의하고 생각이 짧았던 내게 화가 났다. 신랑은 출근했고 나는 어서 빨리 아이가 배고파하기 전에 이 사태를 해결해야 했다.
수면양말을 똘돌감아 락스를 뿌린 후 닦아 냈는데 왠지 이쪽만 그랬을 리 없을 거 같아서 장롱을 뜯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유튜브에 한샘장롱 분해법을 검색 후 곧바로 분해하기 시작했다. 한숨만 쉰다고 될 일이 아니었기에 다 뜯어버렸다.
사태는 심각했다. 후.. 일단 가장 문제가 되는 쪽부터 문짝을 떼고 옷과 이불가지를 빼냈다. 겸사겸사 안 입는 옷들을 버리고 5cm씩 양쪽을 잡아당기고 밀어가며 장롱 한 칸을 빼내는 데까지 성공했다.
오. 마. 이. 갓. 지. 져. 스......
이런 곳에서 아이와 잠을 잤으니 죄책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온다. KF94 마스크와 고무장갑, 락스, 알코올 등으로 무장 후 닦아내기 시작했다.
닦이긴 닦였다.. 하지만 벽지 뒤로 생긴 곰팡이 녀석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쪽 벽면 청소를 하고 나니 4시간이 흘렀다. 안 입는 옷까지 버려버리고 나니 갑자기 의도치 않게 미니멀라이프 하나를 이룬 느낌이었다. 예전 같으면 이지경까지 방치해 둔 나 자신을 자책하면서 온갖 욕이란 욕은 내게 퍼부었을 거다.
근데 오늘은 왠지.. 하 그래도 벽면 전체에 퍼지게 한 것보단 이 정도라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요즘 인생 모토가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오히려 좋아” 마인드라 그랬을까.. 무튼 한샘장롱은 이제 절대 사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이 정도에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옷 정리까지 하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옆지기는 일터에서 응원 아닌 응원을 보낸다.. 크크. 내일 아침에 나머지 두 짝 장롱까지 뜯어내고 박멸시켜야지. 곰팡이야. 기다려라.